먹튀 창업자만 양산하는 실리콘밸리 세컨더리 거래의 민낯
폴 데이비슨은 자신이 창업했던 회사를 각각 구글과 핀터레스트에 매각한 바 있는 전형적인 실리콘밸리의 연쇄창업자입니다. 그는 구글에서 근무할 때 만난 또다른 연쇄창업자 로한 시스와 함께 음성 기반 소셜네트워크 앱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하고 2020년 2월 회사를 설립합니다. 이 기업이 바로 팬데믹 초기 누구나 한 번 쯤 들어봤을법한 '클럽하우스'입니다.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이 연쇄창업자에게 가지는 신뢰는 클럽하우스 시리즈A 당시에도 빛을 발합니다. 과거 폴 데이비슨의 두 번째 스타트업 Highlight의 시리즈A 투자를 이끈 바 있는 Benchmark Capital, 그리고 두 창업자와 오랜 기간 알고지낸 앤드류 첸이 근무하던 안데르센호로위츠(a16z)는 아직 앱을 정식 출시하지도 않은 클럽하우스에 투자하기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입니다.
Benchmark Capital이 당시 제시했던 기업가치는 $75 - 80M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매출도 없고 베타버전 앱만 가지고 있던 기업에게 원화 기준 천 억원대의 기업가치를 제안한 것이죠. 이는 실리콘밸리에서 자신들만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으로 유명한 Benchmark에게도 과감한 베팅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하지만 폴과 로한은 경쟁 투자사인 a16z를 택합니다. a16z는 $100Mn 기업가치로 $10Mn을 투자하면서 창업자의 주식 또한 $2Mn 규모로 매입하는 '신주 + 구주' 거래를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베타테스트 결과가 훌륭하고 제품의 잠재력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설립된 지 한 달밖에 안된 기업의 창업자가 곧바로 12억 원씩 구주를 매각한 돈을 받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일각에서는 실질적으로 '창업자에게 돈을 주고 투자 기회를 산 것 아닌가?'라는 비난도 있었죠.
이후 클럽하우스는 때마침 터진 글로벌 팬데믹의 최대 수혜 기업으로 떠오르며 집에 갇힌 사람들이 목소리만으로 만남을 이어가는 인싸앱로 각광받습니다. 그리고 1년 뒤 곧바로 유니콘 기업으로 직행하죠. 하지만 리오프닝이 시작되면서 클럽하우스의 인기도 시들해집니다. 지금도 서비스는 이어가고 있지만 애초에 목표했던 '음성 기반 글로벌 소셜네트워크'보다는 특정 수요에 대응하는 '생산성' 앱으로 전락한 모습입니다. 과연 클럽하우스가 2021년 7월 시리즈C 당시 인정받았던 5조 원의 기업가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만 남은 상황입니다.
지난 달 FTX의 붕괴 직후 월스트리트저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WSJ] FTX’s Sam Bankman-Fried Cashed Out $300 Million During Funding Spree
2021년 10월 이뤄진 FTX의 두 번째 시리즈B 라운드에서 발표된 펀딩 금액 $420Mn 중 70%가 넘는 $300Mn이 실제로는 신주 투자가 아닌 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의 구주를 사는데 들어갔다는 뉴스입니다. 당시 샘이 투자자에게 제시한 논거는 바이낸스가 가진 FTX 지분을 사오는데 들어간 자금의 정산용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상황이죠.
이러한 대규모 구주 거래가 소위 유니콘 기업과 관련한 거래에서 빈번하게 이뤄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창업자가 투자자 대비 현저하게 높은 협상력을 가진 경우 우선 대규모 신주 라운드를 먼저 진행하여 밸류를 높이고, 뒤늦게 찾아온 투자자들에게 '(앞으로 기업가치가 더 올라갈 것이니) 더 이상 지분 희석은 원하지 않지만 창업자 구주는 매각 가능하다'는 방식으로 당근을 슬쩍 제시합니다. 로켓이 올라타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VC들은 프리미엄을 주고서라도 구주를 앞다퉈 매입합니다.
이제와서 보니 기관자금을 운용하는 VC와 국부펀드, 연기금들이 이사회도 없는 기업의 창업자에게 수천억 원의 자금을 그냥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죠. 실리콘밸리 VC들은 테라노스 사태가 실리콘밸리와 연관되어 언급될 때마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이 아니었다' '제대로 실사를 하는 탑티어급 VC는 전혀 연관된 바 없다'며 선을 그어왔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명성에 먹칠을 한 셈입니다.
미래 구독 매출을 담보로 고금리 대출을 중개해주는 P2P 마켓플레이스 Pipe는 창업자 해리 허스트가 트위터를 '회사 홍보 + Build in Public'을 위한 창구로 적절히 활용하며 유명해진 기업입니다. 최근 구독매출을 보유한 SaaS 기업들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미래매출을 담보로 제공하는 비희석 투자 (Non-dilutive Financing)'가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초기 스타트업 중 한 곳이 바로 Pipe입니다.
Pipe의 창업자 3명은 2021년 초 2조 원 기업가치로 펀드레이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구주 매출을 통해 수십억 원의 자금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면서 AngelList 플랫폼을 통해 주기적으로 직원들의 구주 매출을 주선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직원의 복지를 위해 구주 매출을 진행한다'라고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기도 하였죠.
하지만 해리 허스트를 포함한 세 명의 Pipe 창업자들은 지난 주 갑자기 일괄 사임을 발표하며 '회사를 경영하기에 적합한 능력있는 CEO를 물색하고 있다'고 알립니다. 보통 창업자가 경영진에서 물러나더라도 후임 인선을 마무리한 후 결과를 발표하는 점, 공동창업자가 있을 경우 질서있는 지배구조 이행을 위해 역할을 바꿔가며 회사에 남아있는 관례에 비추어볼때 세 명 모두가 급작스럽게 사임하는것은 어딘가 쫓기며 도망가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해리는 '우리는 제로투원을 잘하는 빌더이지 스케일업을 잘하는 경영진이 아니다'라며 여전히 자신들의 결정이 회사를 위한 것이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Pipe는 최근 들어 소프트웨어 기업의 구독매출에 머물지 않고 미디어, 펀드 관리보수, 심지어 크립토채굴기업까지 대상을 확장하며 '매출담보대출의 나스닥'이 되겠다고 홍보해왔습니다. 루머에 따르면 Pipe는 이사회 승인 없이 크립토 채굴 기업에 천 억 원 가까운 대출을 집행했다가 문제가 생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회사가 '크립토채굴 기업에 대출해 준 $80Mn을 잃었는지'에 대한 테크크런치의 질문에 홍보 담당은 '$80Mn을 대출한 것은 아니며 완전히 상각한 것은 아니다'라는 부정같은 긍정을 남기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가 있음을 암시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회사의 미래와는 별개로 창업자는 설립 2년 만에 수십억 원의 현금을 챙겼고 아직도 자신들의 주식을 보유하며 이사회에도 남아있는 반면 경영진을 잃은 직원들과 투자자들은 3조 원에 달하는 기업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회사를 떠안은 모습입니다.
스타트업의 창업자와 경영진의 구주 매각이 나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장기간 회사와 운명을 함께하며 자신의 24시간을 매일 투자한 창업자가 회사 상장 또는 매각 전이라도 성과의 과실을 공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은 오히려 적극 장려해야 하는 일입니다.
창업자가 가족의 희생과 투자금 회수의 압박에 사로잡힐수록 정상적인 회사 경영보다는 인위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이고 IPO와 같은 외적 이벤트에 집중하게되는 역효과가 나타납니다. 실리콘밸리는 창업자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덜어주고 '회사성장'에 '꾸준히' 집중할 수 있도록 창업자들에게 단계별 구주 매각을 장려해왔을 정도로 '창업자 친화적인' 문화를 자랑해왔습니다.
문제는 유동성이 풍부해지고 투자 경쟁이 심해지자 창업자 구주매출의 본래 취지가 퇴색되고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핵심은 '이해관계'의 일치입니다. VC가 10년의 기간을 두고 창업자의 미션을 지원하고자 한다면 그에 맞는 '견제와 균형'을 갖춘 지배구조를 정립해야합니다. 반면 최근의 구주매출은 창업 후 불과 1 - 2년 사이에 창업자들이 거금을 손에쥔 뒤 먹튀와 자금유용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로 전락한 모습입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창업자의 지분 또한 스톡옵션과 마찬가지로 4년 간 행사가능 주식수가 꾸준히 늘어나는 베스팅 구조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최소 '4년'간 창업자가 회사를 성장시키는데 집중할 수 있도록 투자자와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고 혹시라도 중간에 이탈하는 창업자가 과도한 지분을 보유하는 것을 방지하기위한 일종의 장치입니다.
그런데 설립 1 - 2년만에 창업자가 구주매각을 통해 거금을 손에쥐면 이러한 베스팅 스케줄이 무력화되고 이해관계의 불일치가 생기게 됩니다. 특히 DataRobot의 사례처럼 직원들 몰래 경영진들만 지분을 팔아치우게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죠.
비대면 컨퍼런스 플랫폼 Hopin은 이러한 이해관계 불일치가 가져온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2019년 설립된 Hopin은 클럽하우스와 마찬가지로 팬데믹 기간동안 서비스 수요가 몰리며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기업가치가 상승한 사례입니다. 2020년 6월부터 2021년 8월사이 시리즈A에서 D라운드까지 진행하며 기업가치가 1년만에 100배 이상 치솟았죠.
Hopin의 창업자 죠니는 이 과정에서 구주매출을 통해 무려 2천 억 원에 가까운 자금을 거머쥡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는 구주 매출 직전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여 세금 절세 계획까지 마련해두었습니다.
하지만 2022년부터 다시 대면 컨퍼런스가 시작되자 Hopin의 실적은 빠르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올해 두 차례의 구조조정을 통해 30% 이상의 직원을 해고하였습니다. 투자자들은 자신들이 창업자의 구주 거래를 용인했다는 점에서 공범에 가깝지만 피해자는 오롯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현금화도 못한 스톡옵션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했던 직원들인 것입니다.
창업자 베스팅이나 이사회 중심 경영이 생경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도 파티가 끝나고 음악이 멈추자 잠복해있던 문제들이 수면위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사회가 경영진을 해임할 권한을 챙기지 않으니 학력위조와 경영실패로 물의를 일으킨 창업자가 벼랑끝 전술로 주주와 채권단을 기만하는 사례도 들리고, 창업자 베스팅과 경업금지가 허술하다보니 회사가 어려워지자 이를 내팽개치고 유사 아이템으로 재창업하는 사례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정보비대칭 격차가 큰 창업자 위주의 스타트업 경영에서 거버넌스의 실패는 순식간에 회사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리스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투자자의 손실과 직원들의 실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창업자 친화적인 (Founder Friendly)' 문화를 추구했던 실리콘밸리의 노력이 '창업자 특권 (Founder Privilege)'으로 변질되면서 곳곳에서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난 뉴스레터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제 실리콘밸리에서도 창업자와 투자자간 역학관계가 정상 범위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타트업의 경영이 다시금 지표보다는 본질에 집중하고 펀드레이징 규모와 밸류에이션을 축하하기보다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성과를 응원하는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과연 이번 벤처 혹한기가 과거의 스타트업 머니게임에서 벗어나 건강한 투자 환경으로 이어질 지 관심이 가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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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글로벌 스타트업 & 벤처투자 & 테크기업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주간 뉴스레터 CapitalEDGE의 12월 1주 차 WeeklyEDGE에 기재된 내용입니다. 전세계 스타트업의 이야기를 '투자'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다양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아래 구독을 통해 더 많은 소식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