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콘의 향방: 이제는 타이틀을 반납할 때
지난주 발표된 2023년 3분기 스타트업 투자 동향을 살펴보면 여전히 전 세계 벤처 투자 시장의 회복 시점을 가늠하기 어려운 혼돈의 시기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크런치베이스의 집계에 따르면 3분기 북미 지역 벤처캐피탈 투자는 전 분기 대비 3%, 전년 동기 대비 26%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North American Startup Funding Looked Flat In Q3
미국 벤처캐피털 투자액 6분기 연속 감소세…“회복할 기미 보이지 않아”
하반기부터 점진적인 시장 회복을 기대하던 목소리도 있었지만 당분간은 반등이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최근 IPO 시장이 재개되고 AI 관련 기업들의 대규모 펀딩 소식이 이어졌지만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인 모습입니다.
특히 램프(Ramp), 레드우드머티리얼즈(Redwood Materials) 등 대규모 펀딩에 성공한 성장 단계 기업들이 늘어나며 시리즈 C 이상 후기 벤처 투자는 전 분기 대비 증가한 반면 오히려 시리즈 A - B 단계 초기 기업 투자가 더욱 위축되었다는 점은 상당히 뼈아픈 지점입니다.
지금까지는 벤처 투자 혹한기의 원인을 대내외 환경 변화에 따른 투자자들의 보수적인 태도에서 찾아왔지만, 최근의 투자 침체에 대한 우려는 스타트업의 펀더멘털 약화가 주요 원인으로 분석되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Carta의 집계에 따르면 올해부터 폐업에 이른 미국 스타트업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2023년 3분기의 경우 Carta 이용 스타트업 중 총 212곳이 문을 닫았는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50% 상승한 수치입니다.
설립 이후 SAFE 형태의 자금 조달만 진행하여 실제 가격을 책정하는 정식 라운드(Priced Round)를 진행한 적이 없는 초기 시드 단계 기업의 폐업은 작년 2분기부터 증가하였으나, 최근에는 리드투자자가 존재하고 정식 라운드도 진행했던 기업들의 폐업이 빠르게 늘어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는 기존 투자자들도 브릿지 라운드를 통해 스타트업의 생존 기간을 늘리기보다는 추가 투자를 포기하고 폐업에 동의하는 빈도가 많아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최근에는 벤처 펀딩을 통해 성장을 추구하던 스타트업들의 지상 과제가 현금을 확보하고 런웨이를 늘리는 것이 되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녹록지 않습니다. 매출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이 2022년 2분기 이후 10 - 15개월 수준의 런웨이를 가지고 경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매출 600억 원($50 million)을 넘어서는 유니콘 전후 단계 스타트업들의 런웨이 하락이 눈에 띕니다. 일반적으로 천억 원 단위 펀딩이 가능했던 해당 기업들은 시장 호황기 3 - 5년은 버틸 수 있는 자금력을 자랑하였지만 후기 벤처 투자가 급격히 얼어붙으며 점점 생존 여부조차 불투명해지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이 직면한 어려운 시장 환경은 상장 기업들의 실적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고성장 기업의 경쟁력을 하나의 숫자로 평가할 때 많이 사용하는 Rule of 40 지표가 꾸준히 감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SaaS 기업의 성장성과 수익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사용하는 Rule of 40 지표는 '연간 반복 매출 (ARR)의 YoY 성장률'과 '현금 흐름(FCF) 마진율'의 합계가 고성장 기업의 최소 기준치로 통용되는 40% 이상인지 여부를 평가하는 지표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의 현금흐름 마진율이 -50%이더라도 연간 성장률이 150% 라면 Rule of 40 지표는 100%가 되어 해당 기업은 적자 규모를 상쇄하는 매력적인 성장성을 갖추었다고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위 차트는 상장 SaaS 기업의 1년 전 Rule of 40 지표가 높았던 15개 기업의 해당 지표가 올해 어떻게 바뀌었는지 비교한 차트입니다. 해당 차트를 통해 총 15개 기업 중 먼데이닷컴과 제이프로그를 제외한 13개 기업의 Rule of 40 지표가 작년 대비 하락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형 SaaS 기업들 또한 성장률 하락과 수익률 정체를 피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빅테크와 이커머스 등 B2C 분야에서 시작된 저성장 국면이 소프트웨어와 같은 엔터프라이즈 분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경기 침체가 이어지며 소비자들에 이어 기업들도 소프트웨어와 같은 필수서비스의 지출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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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콘 기업의 딜레마는 줄어드는 적자 폭을 넘어서는 성장률 하락입니다. 과거에는 연간 50%의 성장률만 달성한다면 -50% 수준의 적자폭은 얼마든지 용인되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문제는 유니콘 기업들이 수익성 개선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자 매출 성장률이 급락하며 이제는 성장률의 중간값이 10% 초반까지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현재 유니콘으로 불리는 기업들이 이제는 연간 10% 성장에 -30%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는 '저성장 적자 기업'으로 몰락하고 있습니다. 유니콘의 생명력이 성장의 '속도'란 점에 비춰볼 때 이제는 본격적인 '디-혼 (De-Horn)'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과거 유니콘의 타이틀을 얻은 기업의 90% 이상은 사실 타이틀을 반납해야 한다는 냉정한 평가도 들립니다.
얼마 전 기업가치 10조 원을 인정받은 물류 유니콘 기업 플렉스포트(Flexport)가 창업자 복귀 과정에서 잡음을 일으키며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2022년 창업자인 라이언 페터슨이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나고 아마존에서 23년간 근무한 베테랑 데이브 클라크가 CEO로 경영을 이끄는 지배 구조 변화를 단행하였는데, 지난 9월 9일 단 하루 전 통보를 통해 데이브가 CEO에서 해임되고, 파운더스펀드의 벤처캐피탈리스트로 새롭게 커리어를 시작한 라이언이 갑자기 CEO로 복귀하는 등 진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지만 핵심은 플렉스포트의 위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2022년 약 7조 원의 총매출을 올린 것으로 알려진 플렉스포트의 2023년 상반기 매출은 약 8천억 원 대로 급락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22년 상반기 대비 매출이 70% 이상 하락하며 이대로는 안된다는 투자자들의 긴박한 요청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라이언은 복귀 이후 전 직원의 30%에 달하는 1,000명 이상의 직원을 구조조정하기로 결정하며 위기 경영에 돌입하였습니다. 매출 하락이 컨테이너 운임 지수 폭락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다 보니 단기간 내 회복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CB Insights는 이미 플렉스포트의 기업 가치가 고점 대비 80% 하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플렉스포트 사태는 여기저기 불을 끄러 다니기에 바쁜 유니콘 기업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유니콘 기업들이 사실 매출 하락과 계속되는 적자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생존의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카카오와 야놀자의 구조조정 소식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투자자와 스타트업 종사자 모두 '디-혼'의 시대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본 글은 글로벌 스타트업 & 벤처투자 & 테크산업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주간 뉴스레터 CapitalEDGE의 10월 2주 차 WeeklyEDGE 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뉴스레터를 구독하시면 매주 발행되는 WeeklyEDGE를 가장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