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파워를 착실히 쌓아가고 있는 사우디의 저력
지난 10월, 사우디 네옴(NEOM) 시티 건설을 총괄하는 네옴컴퍼니가 자회사 형태의 CVC인 네옴인베스트먼트 펀드(NIF)를 출범시켰습니다. 현재까지는 네옴컴퍼니 단위에서도 각종 스타트업 및 프로젝트 투자를 진행해왔지만 앞으로는 네옴인베스트먼트로 투자 기능을 모으고 지분 투자뿐 아니라 조인트 벤처 구성 및 M&A까지 총괄한다는 계획입니다.
"NIF는 NEOM의 상업적 성공의 핵심 원동력이 될 것이며, 차세대 산업에 대한 투자에 우선순위를 두어 NEOM의 비전 목표를 현실화할 것입니다."
네옴인베스트먼트가 출범한지 이제 막 한 달이 지났지만 현재까지 언론에 공개된 투자 건만 다섯 건이 넘으며, 아직 공개되지 않은 사례까지 포함하면 포트폴리오 기업 수는 10곳이 넘습니다.
"중동 분쟁에 네옴 위기? 사우디 왕실 전폭지지, 성공 의심안해"
이번 엑스포 주최국 선정의 결과 또한 한국의 반사체가 아닌, 사우디 그 자체의 발전과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슈끄지 사건 등 여러 가지 이슈에도 불구 글로벌 무대에서 사우디의 위상은 지난 5년간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네옴시티로 대변되는 변화를 내세워 '굴기'에 가까운 도전에 나선 모습입니다. 사우디의 달라진 위상을 단순히 '오일머니'라고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네옴인베스트먼트는 네옴이 글로벌 허브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를 수행합니다. 네옴은 1) 제조 2) 수자원 3) 디지털 4) 엔터테인먼트 5) 교육 6) 건축 7) 식품 8) 에너지 9) 스포츠 10) 관광 11) 모빌리티 12) 헬스케어 13) 금융 14) 미디어를 망라한 총 14개 전략 섹터를 지정하고 있는데, 이에 적합한 파트너라면 모두 네옴인베스트먼트의 투자 대상이 됩니다.
네옴인베스트먼트는 지난달 미국 콜로라도 덴버 소재의 초음속 여객기 개발 스타트업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하였습니다. 투자 논거는 간단합니다. 붐 슈퍼소닉이 개발하는 초음속 여객기가 상용화된다면 사우디 네옴 시티와 외곽 도시 및 국가를 잇는 여객기로 활용하겠다는 복안입니다.
2014년 설립된 붐 슈퍼소닉은 올해 안에 모하비 사막에서 첫 비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만약 붐 슈퍼소닉이 계획대로 성공적인 시험 비행을 마친다면 네옴시티 입장에서도 최첨단 항공 모빌리티 시장 선점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네옴인베스트먼트는 출범과 동시에 중국의 자율주행 스타트업 Pony.ai에 대한 $100 million 규모 지분 투자 및 조인트벤처 설립을 발표하였습니다. 네옴시티를 전 세계 최초의 완전 자율주행 기반 통합 모빌리티 도시로 개발하려는 네옴이 현지 생산 및 R&D 센터를 담당할 파트너로 미국의 자율주행 스타트업이 아닌 중국 기업 Pony.ai를 지목한 것입니다.
사우디 국부펀드인 PIF는 오랜 기간 뉴모빌리티 기술에 관심을 보여온 바 있습니다. 2016년 우버에 무려 4조 원이 넘는 자금을 투자하여 지분을 확보하기도 하였으며, 현재도 루시드(Lucid)의 2대 주주로 참여하며 지난달 루시드의 사우디 공장 개소를 이끌어내기도 하였습니다.
영국의 수소연료 항공기 개발 스타트업 ZeroAvia는 지난주 약 1,500억 원 규모의 시리즈 C 라운드를 완료하였습니다. 네옴인베스트먼트의 리드로 진행된 이번 라운드에는 에어버스와 바클레이즈 임팩트 펀드, 영국 인프라 은행 등이 공동투자자로 참여하였습니다.
네옴의 ZeroAvia 투자는 뉴모빌리티와 클린에너지에 방점을 두고 있는 네옴인베스트먼트의 투자 포커스를 잘 나타내는 사례입니다. 당장 네옴시티에 적용 가능한 솔루션이 아니더라도 네옴시티가 표방하는 '친환경 에너지로 자급자족하는 미래도시'에 걸맞은 기업이라면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겠다는 복안입니다.
네옴인베스트먼트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눈에 띄는 특징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미국, 중국, 유럽을 넘나들며 활발한 투자 활동을 전개한다는 점, 둘째, 사우디 및 네옴시티와의 전략적 연계를 강조하면서도 이를 강요하지는 않는 유연함, 셋째, 뉴모빌리티와 하드웨어 및 딥테크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 전략이 그것입니다.
사우디 네옴인베스트먼트의 활발한 투자 활동이 단순히 돈만 있다고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지난 30년간 월가의 큰손 역할을 하며 글로벌 사모펀드와 헤지펀드의 자금원을 자처한 PIF의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존재하고 빈살만 왕세자 등장 이후 이러한 네트워크를 사우디 국가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명확한 전략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사우디는 단순 네옴시티의 발전을 넘어 향후 스위스, 싱가폴과 두바이가 차지해온 글로벌 균형자의 위치를 가져가겠다는 복안입니다. 이를 위해 사우디는 2017년 PIF 산하에 비영리재단인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 (FII, Future Investment Initiative)'를 설립, 글로벌 아젠다를 선점하고 전 세계 오피니언 리더들과 네트워크를 다지는 소프트파워 강화에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올해 7차 총회를 마무리한 FII는 사막의 다보스로 불리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행사로 발돋움한 상황입니다.
지난 10월 한국 정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참여한 바 있는 FII 7차 총회는 골드만삭스의 데이비드 솔로몬과 JP 모건의 제이미 다이몬을 비롯, 블랙스톤, 칼라일, 블랙록, 씨티그룹, 맥쿼리, 세콰이어차이나 등 글로벌 투자 업계의 거물들이 총출동한 행사였습니다.
단순히 오일머니 때문에 사우디가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은 매우 단편적인 시각입니다. FII는 사우디가 공들여 온 '글로벌 아젠다를 이끄는 소프트파워를 가진 균형자'라는 목표를 잘 드러내는 행사입니다.
1차 총회 (2017): 빅 시프트
2차 총회 (2018): 22세기 청사진
3차 총회 (2019): 글로벌 비즈니스의 넥스트 챕터
4차 총회 (2021): 네오-르네상스
5차 총회 (2021): 인류를 위한 투자
6차 총회 (2022): 새로운 세계 질서
7차 총회 (2023): 새로운 가늠자 (New Compass)
미국과 혈맹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중국과의 관계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우디가 노리는 것은 '힘 있는 균형자'입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이 사우디의 역할을 압박한 점은 달라진 사우디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FII가 전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개최하는 또 다른 행사인 FII Priority가 이번 주 홍콩에서 개최됩니다. 뉴욕, 마이애미에 이어 세 번째 개최지로 선정된 지역이 홍콩이란 점만 보더라도 사우디가 미-중 어느 한 축에 기울지 않는 균형외교에 방점을 두는 행보를 이어간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올림픽, 엑스포, 월드컵과 같은 국가 행사가 새로운 도약을 노리는 '굴기' 국가들의 선전을 위한 장이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그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 2030년 엑스포 또한 5년 내 국가 개조를 천명한 빈살만이 추진하는 사우디 굴기의 최정점을 찍는 행사 중 하나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경쟁자가 누구더라도 무조건 가져와야 하는 트로피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전 세계가 새로운 잠룡인 사우디와 격상된 관계를 맺는 것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건 이들과 경쟁을 하고자 했을 때 과연 상대방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사우디가 오일머니를 뿌리고 이미지 세탁에 나선다고 비난하기에 앞서 한국과 부산은 과연 전세계 오피니언 리더를 줄 세우는 글로벌 아젠다 세팅 능력과 전 세계 미래 혁신 기업들에 직접 투자하는 글로벌 펀드가 있는지 곱씹어 봐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국내 스타트업 투자만 중시하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 외치는 폐쇄적 사고에 머무른다면 제2 제3의 사우디가 와도 경쟁은 요원한 일일 것입니다.
본 글은 글로벌 스타트업 & 벤처투자 & 테크산업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주간 뉴스레터 CapitalEDGE의 12월 1주 차 WeeklyEDGE 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뉴스레터를 구독하시면 매주 발행되는 WeeklyEDGE를 가장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