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썼던 글입니다
판매를 시작하는 오후 2시까지는 아직 20분이 남아 있었다. 갈등이 시작됐다. 대로변에서 그냥 기다릴지, 아님 잠시 추위를 피해 있다 시간이 다 되어 줄을 설지. 종로의 한 카스테라 전문점 앞. 평소 지나다니면 어마무시한 줄 때문에 사 볼 엄두를 내지도 못했는데 그날은 호된 추위 탓인지 사람이 없었다. ‘설마 이 추위에…’ 하는 마음으로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서성이다 57분에야 매장 앞으로 갔다. 웬걸. 그새 줄이 10m는 넘게 늘어선 듯 하다. 대만에서 왔다는 대왕카스테라 전문점이 언제부턴가 곳곳에 눈에 띄는가 싶더니 어느 매장 할 것 없이 늘상 줄이 길었다. 도대체 무슨 맛일지, 일본 나가사키 카스테라와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하지만 매번 지나칠 때마다 사람들이 많아 포기했다. 이날은 버텨야겠다 싶었다. 15분 정도를 기다려 카스테라 두 박스를 샀다. 하나는 플레인, 하나는 생크림이다.
카스테라를 써는 칼에서 전해져오는 느낌은 조직이 훨씬 무른 것 같았다. 한입 머금은 첫 느낌 역시 무르고 촉촉했다. 달콤함이 강한 나가사키 카스테라에 비해 단맛은 약하고 은은했다. 이 카스테라는 대만이 원조라는데 대만에서 직접 먹어 본 건 아니라 현지의 맛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대만 단수이지역 노점에서 팔던 카스테라였는데 큼직한 사이즈와 맛으로 인기를 끌면서 히트 상품이 됐다는 것이다. 굳이 대만과 나가사키를 비교하자면 전자는 자애롭고 부드럽고 순박한, 후자는 화려하고 도도한 맛이다. 개인적인 취향은 나가사키 카스테라에 더 꽂히는 것 같다.
어릴 때 먹던 제과점 카스테라는 황홀한 두근거림 그 자체였다. 단맛이 집중되어 있는 쫀득한 느낌의 갈색껍질. 이 부분을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태닝’된 부분을 벗겨 입안에 넣을 때의 그 아찔한 떨림이라니.
카스테라는 또 다른 점에서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저그런 떡덩어리를 환상의 맛으로 변신시켜줬기 때문이다. 엄마는 종종 찹쌀가루를 익반죽한 새알심을 팥죽이나 미역국에 넣어줬다. 그때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한번은 엄마가 다른 시도를 하셨다. 끓어 오르는 새알심을 찬물에 헹군 뒤 부스러뜨려놓은 카스테라 가루 위에 스르륵 굴리는 것이다. 동글동글, 포슬포슬 작은 떡은 한입에 쏙 들어갔고 달콤하고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그 맛은 놀라움과 신비로움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절정을 맛본 것은 2002년 나가사키에서 카스테라를 먹었을 때였다. 100년 이상 카스테라를 구워 온 집이라 해서 찾아간 곳이었다. 아쉽게도 상호는 기억나지 않는다. 황금빛의 살결과 윤기가 도는 갈색빛의 껍질을 가진 카스테라는 마치 눈을 부릅뜨고 아금박스러운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조각 잘라 입안에 넣었을 때 그 빈틈없이 쫀쫀한 맛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전까지 먹었던 카스테라는 카스테라가 아니었다. 지금이야 국내 베이커리나 디저트 카페에서 근접한 맛을 내는 카스테라를 먹을 수 있지만 15년전만 해도 쉽지는 않았다. 카스테라 조각 아래쪽에 붙어 있는 종이를 벗겨내고 만나는 아래쪽 갈색 부분은, 또 다른 눅진하고 깊은 단맛이 났다. 때문인지 아래쪽에 붙어 있는 종이를 벗겨낼 때 묘한 흥분감이 들 정도였다.
카스테라는 서양식 과자이지만 현재형 카스테라의 원형은 일본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궁금하면 답을 찾아보는 위키피디아에도 ‘일본, 나가사키’라고 나와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6세기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총, 담배, 호박과 함께 카스테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카스테라는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빵이라는 포르투갈 말에서 나온 것이란다. 카스테라를 받아들인 일본은 고유의 취향과 스타일로 이를 발전시켰고 현재의 대표상품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돈카츠나 데판야키를 대표적인 일본음식으로 만든 것처럼 말이다.
우에노 지즈코의 산문집 <느낌을 팝니다>에는 카스테라를 지칭하는 ‘카스테이라’ 챕터가 있다. 위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왕국 카스티야에서 포르투갈인이 일본으로 가져왔다는 과자. 카스티야의 과자라서 붙은 이름이 카스테이라라는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카스테라 역시 보신음식이라 불릴만큼 귀하고 비싼 것이었다. 그리고 만드는 방법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초보자는 손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맞다. 완전 공감한다. 한때 홈 베이킹에 빠져 있을 때 카스테라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으나 달걀을 저어 거품을 내는 과정이 몹시 지난했다. 어찌어찌 오븐에 굽는 과정까지 갔으나 황홀한 맛은 커녕 떡도 빵도 아닌 요상한 상태의 괴식을 만들어 놓은 것이 여러차례다. 주방이 온통 과자 부스러기를 흩어 놓은 난장판이 되는 것은 보너스. 그나마 케이크의 베이스로 사용되는 제누아즈, 즉 스폰지 케이크와 비스무리한 상태까지는 가본 적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카스테라는 분류하자면 스폰지케이크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분명히 카스테라만의 뭔가가 있다.
10여년전 박민규의 소설집 <카스테라>가 시내 한 대형서점의 매대에 놓여 있던 모습에 불끈 침이 고였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일단 제목부터 꽂혔던데다 책 표지도 카스테라 가루같은 은은한 빛깔이었다. 특이하고 기발한 문체로 유명한 소설가 박민규 아니던가. 그의 ‘지구 영웅 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낄낄대며 봤던 터라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익살스러운 뜬금포는 여전했다. 전생이 훌리건인 냉장고라니. 고통스러울 정도로 소음을 내는 냉장고와 ‘동거’하는 주인공 남자는 어느 순간 냉장고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냉장고를 이해한다.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냉장고라는 세계에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 그리고 이 세상에 해악이 될만한 것을 다 집어 넣는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책 ‘걸리버 여행기’를 시작으로 심지어 아버지, 어머니를 냉장고에 넣고 학교, 동사무소, 신문사, 오락실도 넣는다. 미국과 맥도날드, 중국도 그에 의해 냉장고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모든 것을 품어 안은 냉장고는 다음날 아침 반듯하고 보드랍고 따뜻하기까지 한 카스테라 한조각을 내놓는다. 눈물을 흘릴 만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맛의 카스테라. 그다운 결말이다 싶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한 카스테라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 건가. 책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은 척박한 내 이해력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됐다. ‘가가린은 카스테라를 타고 비로소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며, 지미 핸드릭스는 카스테라에 불을 붙여 그 소리로 한장의 앨범을 만들었고 이백은 물에 떠 있는 한 조각의 카스테라를 주우려다 삶을 마감했고…마더 테레사는 스스로 거대한 카스테라의 산이 되었다 하며, 체 게바라는 누구보다도 카스테라의 등분에 관한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나의 카스테라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