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오가와 요코
만약 오늘 밤 잠들어 내일 아침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물론, 어떤 기분도 느낄 리 없다. 깨어나지 않으면 기분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잠들던 순간의 기분조차 잊어버렸을 테니 억울하다거나 슬프다거나 할 이유도 없다. 그저 평화와 안녕만 남을 것이다.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아마도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면 부모님이나 어른들은 젊은 놈, 혹은 어린놈이 벌써부터 시답잖은 생각을 한다며 혀를 차게 만들 뿐이리라. 하지만 말을 바로 하자면 죽음은 젊은이 혹은 어린아이의 몫이 아니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통계적으로도 고령자보다 더 어리고 젊은 사람이 죽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억지나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옛날부터 어른들은 오는 것에는 순서가 있을지 모르나 가는 것에는 없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먼저 죽음을 맞을 때면 놀라고 충격을 받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놀랍게도 인간에게 죽음은 몹시 흔하고 가까운 것이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삶의 끝, 호흡과 심장 박동의 정지에서 더 넓은 의미로 확장해보면 이 사실은 금세 명백해진다. 가장 흔한 현상으로 해가 지는 것이 있다. 해가 진다는 것을 단순히 낮에서 밤으로 옮아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하루의 죽음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그것은 자연현상이 아니냐? 자연현상과 인간의 죽음은 필연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떤가?
우리는 살아가며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에 이르는 사람을 만나고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이나 기억하고 있는가?
손에 피를 묻히거나 살인자가 되지 않고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주 간단하다. 까맣게 잊어버리면 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망각이 인간을 보호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보호의 이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미 죽어버렸거나, 죽어가고 있게 된다.
잊는 것 혹은 잊히는 것은 모두 죽음에 아주 가까운 개념이다. 한 때 잊히는 것이 몹시 두려웠던 시간이 있었다. 그들 안에서 내가 죽어버린다는 것이 두려웠던 거다. 그래서 무리해서 친해지려고 노력하기도 했었고, 하지 못하는 것들을 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쓰기도 했다.
그저 잊히는 것뿐인데, 인간은 그렇게 두려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에 말이 너무 길어져 버렸으니 바로 책 이야기로 들어가야겠다.
기억이나 잊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기본 배경에 '기억의 상실'이 있기 때문이다.
서른도 안 된 젊은 미혼모인 '나'는 박사의 집에서 파견 가정부로 일하게 된다. 이 박사에게는 비밀이 있는데 기억에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수십 년 전에 있던 교통사고의 충격으로 그날 이후의 새 기억들은 80분만 지속되다가 없던 것이 되어버리는 것. 이것이 박사의 기억의 결함이었다.
'나'가 박사라고 부르는 사람은 진짜 수학 박사다. 새 기억이 없어도 그 이전의 수학에 대한 기억과 수식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은 박사는 매일을 수식을 풀고, 원리를 증명하는 것으로 소일한다.
'나'에게는 열 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하루는 박사가 아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다음부터는 아들도 데리고 오라고 한다. 그 아들이 왔을 때 박사는 기뻐하며 환영함과 동시에 평평한 머리를 보며 '루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차별 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품어준다는 아름다운 의미였다.
그렇게 시작된 세 사람의 기묘한 공동생활은 수식을 매개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이어진다. 그러나 박사의 기억은 매일 처음에서 시작하고, 그들 셋은 매일 처음 만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만약 박사가 기억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쉬워하며 안타까워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면 그의 삶은 몹시 황폐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지탱하는 수식이 있었기에, 그가 사랑하는 수학이 있었기에 박사는 비극적인 삶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죽음 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는 희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사실 이 책은 갖고 있는 책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지인에게 빌려준 후 돌려받으러 갈 기회를 찾지 못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신세가 됐다. 원래 내 것이었던 책의 생사를 주인인 내가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인 거다. 그 책이 무엇이든 느낄 수 있다면 무척 서운해하고 있을 것이고, 나는 무척 미안한 일을 하고 만 것이 될 거다. 지금도 종종 읽히고 있다면 기쁜 일이겠지만, 그것조차 알 수 없기에 더욱더.
박사의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80분이 지나면 그 이전의 기억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죽어버리기 시작한다는 거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80분 전에 함께 있다가 81분 후에 다시 얼굴을 마주했을 때조차 처음 보는 사이가 된다는 거다. 박사의 주변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이유로 박사는 몹시 고독한 존재가 된다. 자신의 기억은 수십 년 전에 멈춰있기에 그 전에 알던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갑자기 팍 늙어버린 모습에 당황할 뿐이다. 기억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인간에게 있어 죽음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기억과 현실의 불일치 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거의 모든 기억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지금 스스로가 '나'라고 믿고 있는 존재가 사실은 '나'가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일으킨다. '저주'라는 말 말고는 달리 이런 상황을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기억에 대한 불신, 스스로에 대한 불신, 존재의 불확실, 극단적인 고독과 고립감.
차라리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지 모를 그런 악몽 같은 상황이 바로 박사의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사는 이러한 삶을 받아들이고, 견뎌낸다. 견뎌내는 것을 넘어 즐기기까지 한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수학과 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엉뚱한 소리가 되겠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더라도 '나라는 존재였던 존재'가 심은 사과나무는 남을지 모른다는 기대는 희망이 되기에 충분하다.
내일 멸망할 것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존재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지워버리게 된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지는 태양을 보며, 하루가 끝나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내일이 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내일이 '반드시' 시작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저 헛되고 헛된, 아무 의미 없는 기대이자 믿음인 거다.
박사는 자신의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잘 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쪽지에는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고 적어뒀다. 수십 년의 기억이 모두 사라졌음을 알게 되는 순간, 앞으로 기억하게 될 모든 것이 80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과 서러움에 매일 아침 눈물 흘리지만, 그것조차 받아들이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것이 그의 삶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우리는 너무나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 시작하는 것이 두려워 먼저 겁을 먹고 스스로를 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받아들이고 극복하기보다 도망치기 위해 뒷걸음질 치는 일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지켜내기 어렵다.
하루 종일 걸어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라고 해도, 걷는 것이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 텐데, 굳이 힘들여서, 땀 내면서 걸어갈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은 몹시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합리적인 생각은 결국 스스로를 제자리에 못 박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 뿐이다.
우스개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어차피 다시 배고파질 건데 먹어서 뭐해요?
그렇다고 안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은가? 먹지 않는 자에게는 매우 빠른 쇠약과 죽음이 찾아갈 뿐이다.
무의미하다고 하는 말은 그렇게 쉽고 간단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고작 80분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나이 든 수학 박사도 있는데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다채롭고 풍요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인가?
80분마다 그때까지의 자신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결코 유쾌하지도 즐거울 수도 없을 거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80분마다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부활한다, 분명 신선한 경험이 되겠지만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행히 나의 기억은 24시간은 너끈히 지속된다. 오늘의 내가 되기 위해 죽어간 어제의 나에게 정말 오랜만에, 새삼스런 인사를 건넨다.
안녕, 어제의 나!
안녕! 오늘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