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외/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2010
음식은 몰라도 책에 관한 한 편식하거나, 읽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돌아보면 엄청나게 편식을 해왔고, 읽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유독 피해 다녔던 것은 한국 문학이었다. 그중에서도 현대 한국 문학은 거의 읽은 것이 없었다. 그나마 읽었던 것이 이청준의 『매잡이』나, 채만식의 『태평천하』, 심훈의 『상록수』, 염상섭의 『삼대』, 이광수의 『무정』처럼 교과서에서 조각만 읽는 것이 감질나서 찾아 읽은 1940년 전후의 작품들 뿐이다.
어려서부터 한국문학과는 그리 가깝다고 할 수 없었던 것이 처음 사서 읽었던 장편 소설이 와룡생이라는 중국 작가의『천애기』였다. 무려 5권이나 되는 길고 두꺼운 이야기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4, 5학년이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스탕달의 『적과 흑』은 읽었을지언정 제대로 이름을 기억하는 변변한 한국 작가도 없었으며, 고등학교에서는 『데미안』에 심취해서는 증표를 지닌 자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명백한 중 2병이 늦게 온 것인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서 몇몇 문학상 작품집을 사기도 했지만 몇 작품인가를 읽다가 덮어버리곤 했다. 더 좋지 않았던 건 대부분이 단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편에 대한 공포증까지 생겼던 거다. 짧은 이야기 속에 엄청나게 많은 것을 욱여넣은 것 같은 작품들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것은 몹시도 신경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차라리 5~600 페이지가 넘는 장편을 읽는 것이 훨씬 수월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런 배경들로 이 책은 정말 오랜만에 읽은 한국 문학의 단편집일 뿐 아니라 처음으로 제대로 읽은 것 같은 작품집이기도 하다. 아마도 혼자 읽었다면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나, 새로 참여한 독서 모임에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작품들 속에 숨겨진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 유효했다고 생각한다.
혼자서는 다 읽기도 전에 분명 덮어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이게 뭔 소리야."하면서 말이다.
수상작인 이기호의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부터 김 숨이나, 김중혁, 정용준, 편해영과 같은 이름은 몇 번인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물론 작품은 아는 것이 없었지만 말이다.
이 글에서 각각의 이야기의 내용까지 밝힐 생각은 없다. 한 편 한 편이 그리 길지 않으니 관심 있는 이는 직접 읽어보면 되는 것뿐이다.
좋았던 작품도 있고, 이게 뭔 소린지 모를 작품도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수상 작품들, 한국 문학의 문단의 폐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겠는데, 이야기의 결말, 스토리의 완성보다 문체와 상징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예전에도 단편을 꺼려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도무지 이야기의 전개나 결말에는 관심이 없이 작가가 하고 싶은 것만 잔뜩 늘어놓다가 독자를 바보로 만들어 놓은 상태로 이야기를 끝장내버리는 거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이 문학상을 수상하고, 그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
'작품성' 역시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 작품성이라고 하는 것도 솔직히 그렇게 수명이 길어 보이지 않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한국 문단에서만 인정을 받는 작품이라면 솔직히 반성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최근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상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마치 한국 문학 전체의 위상이 몇 단계 높아진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데, 정말 그런 것인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본다.
한국 문학을 거의 읽지 않아 온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주제넘고,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만 봐도 그 수준의 고하가 명백함에도 동일하게 수상했다는 점은 의문이었다. 이런 재미없고 막연한 이야기를 누가 읽을까 싶은 것도 있었다.
나 자신의 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점은 '나는 비교적 많이 읽는 편인 독자'라는 것이다. 비교적 적게 읽는 사람들의 견해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이 읽는 사람의 견해가 더 정확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 아닌가.
더 많이 읽는 사람이 그렇게 느꼈다면 더 적게 읽는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가능성이 높거나 오히려 더 좋지 않게 여길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한국 문학에는 한국 문학 나름의 맛이 있고, 읽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실제로 이 작품집은 재밌게 읽었고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해의 폭을 넓힐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결정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재미있게 읽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독서모임에 나가며 한국 문학을 더 읽고, 한국 문학에 대해 더 생각하고 배워볼 생각이다. 더 많이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다면 더 알려고 하는 것이 맞다. 알지 못해서 재미없으니 아예 읽지 않겠다는 건 그냥 읽고 싶지 않다는 핑계에 불과하지 않을까.
문학을 사랑하지도, 소설을 읽지도 않으면서 노벨 문학상 수상을 바라는 국민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문학을 찾아 읽고, 작품을 즐기면 될 일이다.
왜 우리나라는 노벨 문학상을 한 명도 못 타는 거야? 하고 남에게 물을 게 아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한국 문학을 읽지 않고, 문학을 즐길 줄 모르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잠깐, 짧게 적는다는 게 결국 40분 가까이 떠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작품을 통해 발견한 작가들의 작품을 몇 가지 더 읽어봐야겠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사놓고 읽지 않은지 몇 년이니 이번 기회에 읽어보고 말이다.
이제 시작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국경을 넘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외국의 작가들, 작품들만 읽었던 것은 마치 문학에 국경을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변화의 해다. 나아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