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_김영하
새삼스럽게 김영하라는 작가의 위력을 실감한 작품이다. 이야기꾼. 김영하는 확실히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퇴근이 조금 일렀던 날, 자리에 앉으면서 며칠 전 사둔 『살인자의 기억법』을 집어 들었다. 얇다고는 하지만 150쪽 가까이 되는 이야기를 2시간 정도 만에 내리읽었다. 중간에 그만 읽고 다음 날 읽으려던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 끝까지 읽고 말았던 거다.
그건 자의라고 하기보다 저절로 그렇게 된 거였다. 한창 트릭이 무르익어 완전 범죄를 향해 나아가는 사건을 지켜보는 심정, 완전 범죄를 확신하는 범인의 턱 아래까지 파고 들어간 탐정의 대결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한 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느 곳 하나 메모하거나, 기억하기 위해 멈추지 않은 것은. 물론 멋들어진 문장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말이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살인자의 기억법』 중
이 문장은 무척 멋져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문장은 아니다. '정의'를 내린다는 건 멋있는 일이지만 그 정의를 받아들이고 나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대부분 빼앗기고 만다. 이 문장에서 "그래, 무서운 건 시간이지."하고 동의하고 나면, "그래, 아무도 이길 수 없으니까."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베베 꼬인 마음이라는 걸 알지만, 그런 여지없음이 썩 내키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오히려 이런 문장은 어떨까?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살인자의 기억법』중
정말, 무엇에 졌다는 걸까? 졌는지 어떤지, 무엇에 졌는지 모르는데 정말 질 수 있는 걸까? 그럼에도 뭔가 어렴풋하게나마 어떤 느낌인지 알 것도 같다. 여기서 내 상상의 세계는 드넓게 펼쳐진다.
이야기의 몰입감이나 속도감에 비하면 결말은 오히려 너무 뻔하고 식상한 편이었다. 흔한 소재, 식상한 결말을 필연적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솜씨, 진짜 이야기꾼의 진정한 실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결말이 사실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면? 내가 결말이라고 믿었던 것이 실제로는 과정이었고 그 이후에 진짜 결말이 준비되어 있었다면? 예를 들면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했으면 역시 너무 식상했을까? 결말이 났지만, 끝나지는 않은 이야기,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열린 결말로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살인자'의 이야기라고 했으니, 살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물론 경험이 없기에 살인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고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경험해야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더라도 어느 정도는 상상을 통해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 상상이 전혀 실제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야기의 화자인 김병수는 전문가란 자기가 모르는 것을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고 말한다. 전문가가 보기에는 같지 않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살인충동'을 얘기해야겠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어느 아침, 비가 그치고 난 후 상쾌해진 공기 속을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문득 불쾌한 냄새가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더 멀지도 않고 더 가깝지도 않은 딱 15미터쯤 앞에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는 남자가 있다. 앞지르자니 멀고 참고 가자니 열 받는 상태다. 거기에 나는 원래 담배 피우는 사람을 싫어한다. 때로는 몹시 싫어하며, 보통은 대단히 싫어한다. 망가진 기분, 불쾌한 감각, 앞에서 담배 피우며 걸어가는 사람의 뒤통수를 짱돌로 있는 힘껏 내리쳐도 죄가 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만약 비가 그친 후의 상쾌한 공기를 만끽하던 아침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열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발견한 짱돌로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가는 사람을 내려치면 죄가 된다면 내려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날 아침은 비가 그친 후의 상쾌한 공기로 가득했고, 짱돌로 내려친다고 해도 죄가 되지 않았기에 내려친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우연히 발견되지 않을 짱돌에 대비해 항상 가방에 손에 맞는 짱돌을 들고 다닌다. 다음에는 앞에서 담배 피우며 걸어가는 사람이 나타나는 족족 준비해둔 짱돌로 그들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내려친다.
이런 상황은 내 상상 속에서만 생길 수 있는 걸까? 충동은 처음에만 충동일 수 있다. 한 번 충동을 허락하면, 다음에는 조금 더 수월하게 같은 행위를 하게 되고, 그다음에는 생각하지 않아도 하게 되며, 결국은 무감각해진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장 그르누이처럼 타고나기를 무감각하게 태어나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해치는 것에는 망설임이라는 게 있을 수밖에 없다. 장 그루누이같은 인간은 예측이 가능하다. 충동적으로 보이는 살인조차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통의 인간의 경우가 더 예측하기 어려운 건 목적이 없어도 충동적으로, 그야말로 우발적으로 타인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참을 수도 있지만 참기를 그만두고 충동에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 망설임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시작이 아니라 끝이라고 한 이유는 이후로는 자신이 충동에 자기를 내어준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같은 행동을 거듭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닮아 있다.
거의 모든 흡연자가 충동 혹은 호기심 혹은 다른 어떤 것으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을 거다. 그러나 선택한 다음부터는 단지 습관적으로 그 행위를 계속할 뿐이다. 담배가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도대체 그 맛이란 건 어떤 맛인지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맛' 이외에 어떤 맛이 난다는 말인가?
자, 쓸데없는 얘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보통 사람은 연쇄 살인범을 이해할 수 없다. 비흡연자가 흡연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위에 적은 내 상상으로의 '살인충동'이나 '흡연'에 대한 이야기처럼 뜬구름 잡기 식이 되어버리는 거다.
결론적으로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는 것은 살인자를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문가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이야기할 때까지만 전문가인 법이기에 김영하 역시 살인에는 전문가가 아님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는 거다. 그는 다만 글을 짓는 데는 전문가임을 아주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 속에 종종 불교의 법문이 등장한다. 이 법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모른다고 해야겠다. 다만 확실한 건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이던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던 그 누구의 기억이라고 해도 확실하고, 정확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거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건 그런 의미다. 확신하면 할수록, 그 확신이 크고 또 강할수록 정확한 것도, 확실한 것도 아닐 가능성 역시 커지게 된다. 그러니 너무 간단히 단정 짓지 말자. 시간은 아무도 이길 수 없으니까.
결국 모두가 시간 앞에서 어쩐지 졌다는 기분을 느끼고 말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