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모르고는 죽을 수도 없던 남자 이야기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_가브리엘 마르케스

by 가가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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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으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무척 슬픈 일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 안의 무엇이 어느 사이엔가 죽어버려 더는 살아 있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살아있어도 그는 이미 죽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이야기다.


젊은 시절, 일찍부터 익힌 쾌락에 빠져 결혼마저 포기한 채 나이 든 노인이 있다.

얼마간 나이가 든 후에는 사창가를 드나들거나 여자를 사는 일을 그만두고 비교적 조용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90살이 되던 날, 문득 임박한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쾌락으로 점철된 삶과 사랑 없던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오랜만에 젊은 시절 자주 찾던 곳에 전화를 걸어 '처녀'를 준비해 달라고 한다. 그것도 '당장', '오늘 안에' 말이다.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던 '로사 카바르카스'는 결국 처녀를 준비하는데 그 처녀는 열네 살 된 깡마른 여자 아이였다.


이 90살 노인에 대한 추가 설명을 하자면 열두 살 때부터 여자와 관계를 시작했고, 50줄에 접어들었을 때 총 514명과 적어도 한 번 이상 잠을 잤으며 그 이후로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거기서 그치지는 않았다.

특이한 것은 지금까지 잠을 잔 여자 가운데 무슨 이유에서든 돈을 주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수 많은 여자를 만나왔지만 단 한 번 결혼 직전까지 갔을 뿐,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나이 들어왔다.


이 노인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 온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보통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가 "창녀 때문에"이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육체적 관계만을 지속하고 그 안에서 쾌락을 느끼는데 급급했으며, 언제까지나 '늙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그에게는 결혼 보다는 혼자가 더 편안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처음으로 늙음에 대해 생각한 것이 바로 90세 생일 며칠 전이었다.

'늙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결과 90세 생일에 처녀와 잠 자겠다는 결심을 떠올린 것을 보면 이 노인, 분명 보통은 아니다.


이 노인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노인은 <롤리타>의 험버트보다 질이 나쁘다. 거기에다 이 노인의 나라도 적잖이 미쳐있다.

나이를 떠나 한 남자가 '오늘 내로' 처녀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다고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나라라니.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나라인지 모르겠다(어쩌면 그것이 어느 나라에서나 실현될 수 있는 사소한 일일 지 모르다는 생각도 든다). 작품의 분위기는 이러한 상태를 냉소적으로 꼬집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중심적인 인상으로 자리하고 있지는 않다.


노인은 결국 90세 생일 밤, 처녀와 잠 자리에 든다. 하지만 그 처녀란 이제 열네 살 된, 작고 깡말랐으며 처음이 두려워 마신 쥐오줌풀 물약에 취해 깨어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노인은 불현듯 어떤 깨달음을 얻고, 소녀의 옆에 조용히 누워 밤을 보내고 새벽에 자리를 떠난다.

그야말로 최초의 경건한 밤을 보낸 셈이다.


충격적일 수 있는 반전일 것 같은데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90세 노인과 열네 살 소녀의 사랑 이야기다.

'델가디나', 자신의 처녀를 사려고 했던 90세 노인을, 몇 날 밤이고 자신의 곁에 조용히 누워 자고, 이야기를 나누고, 선물을 가져다 주는 노인을 노인이 델가디나라고 부르는 이 소녀가 노인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다'고 로사 카바르카스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91세가 되던 날, 죽음이 아직 들이닥치지 않았음을 깨달은 이 노인은 소녀와 조금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할 것을 생각하며 아침을 맞이한다.


어설프게 줄거리와 인상이 섞이게 된 데는 이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느끼기에는 아직 내가 너무 젊으며, 90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사랑을 쾌락 위에 올려놓지 않은 사람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궁하기는 하지만 핑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애초에 후다닥 읽히는 이 작품을 천천히 곱씹어 소화할 수 있게 되려면 두 번은 더 읽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노인이 써온 칼럼과 90세 생일 이후에 쓰는 칼럼의 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지만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다.


노인은 쾌락을 최우선으로 하고, 책임과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 결과 결혼을 깨고 사창가로 돌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죽음이 임박한 '늙음'을 인식한 순간에 '처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억지처럼 보이며, 자신을 늙은이 취급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어린 태도 역시 맹목적이다.

자신이 상상 속에 떠올린 정황을 기반으로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리고 절교를 선언하는 부분 역시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며 충동적이다.


도덕적으로 판단해보면 원숙한 성인인 노인이 아직 보호받아야 할 소녀를 원한다는 것부터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 된다.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든, 관습이 어떻든 간에 아직 미성숙하고 무지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는 노망난 노인의 관점에서 쓰여진 '광인일기'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노인을 사로잡은 소녀 '델가디나'는 마지막까지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으며, 수수께끼 같은 거울 속 메모 몇 줄만이 소개될 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늙음'과 '사랑',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나이 듦의 자각'과 '사랑의 시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90살이 된 노인은 사랑을 시작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 사랑의 대상이 열네 살 소녀여선 안 되는 것일까?

열네 살 소녀는 90살 노인을 어떤 마음으로 미친 듯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 마음이 정말 '사랑'일 수 있을까?

이야기의 전개상 노인은 마지막까지 소녀를 경건하게 사랑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이 내린 '노새 같은 능력'으로 소녀를 사랑했을 수도 있다. 그런 전개될 수 있지만 전개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판단이나 예측은 그만두기로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절실히 떠올린 생각은 육체와 정신의 부조화에 대한 것이었다.

육체는 나이에 따라 늙고 쇠약해져 가지만, 정신은 언제나 한결같이 젊다고 믿고 있다면 그 사람은 늙은 것일까 젊은 것일까?

늙어버린 육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늙은 사람에 대해 '달리' 행동하게 되지만 당사자는 그런 대우에 분노하고 분해한다면 어느 쪽의 잘못이 더 큰 것일까?

어느 쪽이든 결국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는 일은 무척 힘겹고 쓸쓸한 일일 것 같다.

거기에 늙어가면서 한 번도 누구를 사랑한 적 없다면 그 쓸쓸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늙어버린 육체와 정신을 한 순간에 덮쳐버리고 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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