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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Feb 08. 2017

'사람이 먼저'인 세상은 이제 끝나버리고 만 걸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우리 이야기다.

날마다 자유와 삶을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네.
어린아이,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이곳에서 위험에 둘러싸여 
알찬 삶을 보내리라.
나는 사람들이 그리 모여 사는 것을 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고 싶네.
그러면 순간을 향해 말할 수 있으리라.
<순간아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이 지상에서 보낸 내 삶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

<파우스트>_열린책들 중

 영화 감상을 적기 시작하면서 <파우스트>를 인용한 이유는 이제부터 이야기할 영화 속 인물, '다니엘 블레이크'야말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삶의 흔적'을 남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꼭 한 번 보시기를 권하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휴지나 손수건을 꼭 준비하라는 말도 함께 전합니다. 아무리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준비해도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영화의 배경은 영국입니다. 신사의 나라, 한 때 세계의 절반 가까이를 지배했던 제국, 승전국, 선진국, 유럽의 중심. 한 마디로 말하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라, 그런 영국 말입니다.

다니엘 블레이크, 댄은 오래 병치레를 하던 아내를 떠나보내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댄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친절하며, 뛰어난 솜씨를 지닌 40년 경력의 목수이기도 합니다. 겉보기에 조금은 까칠하고 엄격하지만 연민과 배려, 동정과 호의를 품고 살아가는 마음 착한 이웃이기도 하죠.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댄은 심장병으로 쓰러지면서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심장이 나아지기 전에는 의사가 일하는 걸 허락하지 않기에(법에 의해) 질병 수당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질병 수당 신청 심사를 받으러 갔더니 심사관이 묻는 질문들이 하나 같이 무의미한 데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복잡합니다. 참다못해 댄은 심사관에게 '당신이 정말 전문가가 맞느냐?'라고 묻습니다. 심사관은 '정부의 인정을 받은 전문가'라고 말합니다. 사실 해당 심사관은 정부가 민간에 위탁한 심사 기관의 직원이었고, 다만 행정상의 절차를 대행하며 정해진 심사만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규정'대로 심사하고, '원칙'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기관'이었던 거죠. 

 설상가상으로 질병 수당 지급이 거절되고, 댄은 항의해 보지만 이의 제기나 항의 조차 정해진 규정과 절차를 이행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는 판에 박힌 답만 돌아옵니다. 이제는 정말 생계의 위기가 코앞으로 닥치게 된 거죠. 

 비슷한 시기, 한 여자가 두 아이와 함께 런던에서 이사를 옵니다. 낯선 도시의 낯선 지리 탓에 기관에서 제시한 약속 시간에 늦은 여자는 지원금의 40% 삭감 제재 대상에 오르게 됩니다. 직업도 없이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에게 40% 삭감은 치명적인 처분, 어쩌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부탁도 하고, 매달려도 보지만 공무원들은 단호하고도 엄격하게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돌아가라고, 통보를 기다리라고, 다시 절차에 따라 이의를 제기하라고 '규정'을 내세우며 쫓아내 버리는 거죠. 

 댄과 여자, 케이티가 처음 만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실업자이자 노인, 한 사람은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구직자였죠. 두 사람은 세대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사회적 약자'라는 거죠. 

 자신의 처지도 딱하지만 댄은 적극적으로 케이티를 도와줍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순수한 호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댄의 처지도, 케이티의 처지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습니다. 희망은 점점 흐릿해지고, 희미했던 불안은 점점 또렷한 현실이 되어갑니다.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어야 하는 걸까요. 


 거의 모든 것의 시작에는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왜?"입니다.

 왜 하는가, 왜 해야 하는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 '왜'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풀어내기 위해 우리는 다양하고도 많은 방법을 강구하고 실행하고 있는 거죠. 

행정이 그러하고, 법이 또한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제게 공공 기관의 행정은 '행정'이라는 말보다 '탁상 행정'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제 짧은 생각으로는 너무나 많은 규정과 절차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행정 기관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부당하게, 편법과 불법으로 얌체처럼 구는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그러한 과정'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법에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는 이유가 한 사람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인 것처럼, 행정에서도 불편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원칙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처리의 지연이나 거절이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요. 

 법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법은 시민과 국민을 통제하거나 사람 위에 군림하기 위해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왜 법이 필요했는가라고 묻는다면 시민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서라고 답하지 시민을 지배하고 위협하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실상은 법이 시민의 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모양새가 되어있습니다. 

 민원인보다 행정 절차가 더 중요해지고, 피해자보다 법의 원칙이 중시되는 가치의 역전이 만연하게 된 겁니다.


 사회적 강자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이러한 피해는 치명적입니다. 문자 그대로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거죠. 한 번의 기각이, 한 순간의 지연이, 한 차례의 착오가 생사를 가르기도 합니다. 


 영화 속 장례식 장면에서 '오전 9시의 장례식은 가난한 사람들의 장례식이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 시간이 가장 '싸게'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죠. 장례식은 지극히 조촐합니다. 몇몇의 지인과 이웃들이 참석했을 뿐이죠. 이들 모두에게도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가난하거나, 약하거나, 소수라는 거죠. 


 '약하기 때문에 서로 도울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약하다고 해도 도움이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왜 돕는가?"

 그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약해서가 아니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며, 도움이 되기 바라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먼저'의 처음과 지금이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사람이 먼저'임을 깨우쳐주지 않으면 잊어버릴까 봐 일깨우는 말로 들리는 거죠. 

 사람보다도 앞서는 게 너무나 너무나 많아 보이는 지금입니다.

'절차'에 따라야 하고, '규정'을 어겨서는 안 되며, '원칙'은 고수되어야 하고, '법'은 예외를 허락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거죠.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규칙들이었건만 이제는 사람이 규칙을 위해 참고, 기다리고, 희생되어야 하는 지경에 놓여있습니다. 모순이죠. 사람을 위한다는 명분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부모나 다름없는 사람을 해치는 지금.


 영화 속에서 댄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중


소위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자존심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라고요.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자존심이 아무리 싸구려에, 억지스러워 보이는 것이라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게 되기도 합니다. 정말, 이제 남은 건 자존심 하나뿐인 사람들 에게는요.


 이 사람들의 자존심이 '싸구려'처럼 보이는 건 오해입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비굴하지 않게,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마지막 자존심은 평생의 삶과 같은 무게를 지니게 되는 겁니다. 잃어서는 안 되는 것, 놓쳐서는 안 되는 것, 포기할 수 없는 것인 셈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타인과 동등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 같은 거니까요. 


 이 영화를 두고 형평성이나 평등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한 인간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며 눈물 흘렸던 이유는 영화 자체가 전하는 감동이나, 슬픔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에서 더 지독하게 진행되고 있을 바로 이 순간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매일 늘어놓는 불평과 불만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행동이었으며, 본질에서 동떨어진 마음가짐인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본질.'

삶의 본질은 물질적인 풍요와 여유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의 효율적인 업무처리를 위한 원칙과 규정들이 생겨난 이유는 '여유'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기관이나 절차 운용에서의 '여유'가 아니라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마음의 여유 말입니다. 

 이러한 본질에서 '사람'이 빠지면서 온통 '효율'과 '체계'만이 중요해진 형태가 지금의 '행정'일 겁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행정인지요.


 가장 아름다운 풍경에서 멈춰야 할 시간이 가장 악몽 같은 순간에서 멈춰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시간 같은 건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사람이 먼저인 시간이 돌아왔으면 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속 이야기, 슬픈 비극이 자꾸, 자꾸만 반복되지 않도록.

슬픈 아픔의 연결 고리를 끊어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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