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만들어진다. 저절로 혹은 스스로

사조영웅전_김용

by 가가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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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했던 8월, 더위도 이 작품에 몰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지인이 보내준 사조영웅전 세트를 아껴 읽으려 했지만,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것이 무협 소설의 특징이기에 새벽에 혹은 밤늦게까지 읽다 보니 금세 '읽히고' 말았다.

[이 책 좀 읽어줘!] 사상 처음으로 책을 제공받아 읽었던 작품이라 색달랐던 데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언젠가, 어딘가에 적었던 것처럼 처음으로 샀던 기억이 남아있는 책이 무협지다.

부모님은 아이에게 책을 읽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분들이었다. 정확히는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는 것에 가깝다. 땅에 가까웠고, 흙에 닿아 있었지만 그 모든 삶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하는 순박한 분들이었다.

집에서는 돌연변이나 다름없는 게 나였다. 왜 유독 나만 책에 빠져들었는지 그 이유는 앞으로도 밝혀지지 않을 거다. 다만 오래전에도 책이 좋았고, 지금은 더 좋다는 것만 알면 된다고 생각할 뿐이다.


용돈이라는 게 달리 있는 게 아니었기에 세뱃돈이나 심부름을 하고 받은 돈을 모아 두고는 했다. 보통은 과자 따위의 군것질에 썼지만 어느 날은 책을 살 생각이 들었다. 그때만 해도 작은 시내에 서점이 세 개나 있을 정도로 서점이 흔했던 시기였다. 무슨 책을 어떻게 사야 할지 몰랐기에 한참이나 서가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고르게 된 책이 <천애기>라는 무협지였다. 그때 다섯 권으로 나왔던 책이었는데 나중에는 한 권 한 권 사서 전 권을 다 모았지만 언제였는지 아궁이의 불쏘시개가 되었는지 고물상의 폐지가 되었는지 사라져 버린 환상의 책이 되었다. <천애기>의 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금서(禁書)", 한자는 몰랐어도 풀어 쓴 말을 읽고 이해했다. 읽는 것이 금지됐던 책.

이 책은 중국에서 금서로 지정됐었다고 한다. 왜였는지는 잊었다. 내용은 무림의 절대 고수를 아버지로 둔 한 청년 고수가 겪는 고난과 성장, 그리고 모험과 사랑이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날에 무협지에 입문했으니 빠르다면 빨랐던 셈이다.


<사조영웅전>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다. 그때 부천의 한 헌책방에서 500원인가를 주고 <영웅문> 시리즈의 <몽고의 별>을 산 게 첫 만남이었다. 그 후 차곡차곡 시리즈를 모아서 3부에 걸쳐 <영웅문> 전 권을 모았으나 이사를 자주 다니던 때였기에 헌 책방에 무더기로 팔아버렸다. 물론 저렴하게.

그렇게 십 수년이 지난 후 세진 씨의 호의로 다시 만난 <사조영웅전>을 마주했을 때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으니.

새삼 지인께 다시 고마움을 전한다.


<사조영웅전>은 사실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곽정'이라는 순진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소년이 '황용'이라는 절세 고수의 딸이고 예쁘고, 총명한 소녀를 만나고, 고수들과의 인연이 연이어지면서 또 한 명의 절세 고수로 성장해 간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줄거리를 말해버리면 이 책이 무슨 '재미' 혹은 '가치'가 있느냐 하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곽정과 황용의 만남은 처음부터 마음을 술렁이게 한다.

처음에 황용은 얼굴에 검댕이를 칠하고 옷은 더럽고 지저분하며 냄새까지 풍기는 거지차림으로 곽정 앞에 나타난다. 곽정에게는 충분한 돈이 있었고, 잘 차려입었으며, '홍마'라고 칭해지는 전설의 명마가 있었다.

거지 노릇을 하던 황용이 한 만두 가게에서 만두를 훔쳐 먹으려다 주인에게 들켜 곤경에 처하자 곽정은 자기가 돈을 내어 황용을 먹인다. 그 뿐 아니라 자신이 입고 있던 담비 조끼를 벗어 입혀주며, 아끼는 말까지 태워 보낸다.

황용이 소녀라는 것도, 예쁘다는 것도, 아버지가 절세고수라는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순히 진심 어린 호의에서 그렇게 하는 거였다. 거기에 황용을 아우로 삼으며 누구보다도 너를 '믿어주겠다'는 말을 하는 그 담담하며 솔직한 모습에 어찌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사조영웅전>의 배경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송 왕조가 쇠퇴기에 접어들고 금나라는 세력을 떨치며 송나라의 영토를 침범할 뿐 아니라 조정에는 간신이 넘치고, 내정에 간섭을 당하며, 공물과 공녀를 바쳐야 하는 수모에 시달린다. 우국 충정하는 지사들은 중앙에서 배제되어 숙청되고, 결국 점점 송나라는 기울어 간다. 그 와중에도 황제와 간신배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니, 낯익은 풍경이다.

금나라의 권세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북방의 몽고가 테무친(칭기즈칸)을 중심으로 뭉쳐 남하하며 금나라와 송나라를 압박하기 시작한 거다. 결론적으로 <사조영웅전>은 송, 금, 원나라의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송나라의 명운을 염려하는 애국심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 그리고 사랑까지를 그린 작품이라는 거다.


삐딱하게 보자면 '한족'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중국의 민족주의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람과 삶과 신념들을 읽어보면 마음을 조용히 울리며 퍼지는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곽정은 복이 많은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지나치게 솔직하고 단순하며 순박해서 쉽게 속아 넘어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직하기에 일을 그르치는 일도 적지 않다. 오해를 풀려고 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결국에는 '알아줄 것'이라 믿는 것도 사실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죽는다.

강호의 속성은 피로 피를 씻는 일의 반복이다.

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용서도 화해도 쉽지 않다.

거기다 무인이란 궁극의 경지를 추구하기에 순수한 무인일수록 위험할 수 있다. <사조영웅전>에서 사건의 핵심에 있는 '구음진경'처럼 전설적인 무공이 담긴 책이라면 모든 무인이 탐낼 수밖에 없다. 그 목적이 자신이 최고수가 되기 위해서건, 연구를 위해서건, 본능에 따라서건 관계없이 해가 되기 쉬운 것이 희대의 무공 서적인 거다.


현대로 시선을 옮겨보면 '구음진경'이라는 기서는 '성공' 혹은 '돈'이 될 수 있을 거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좇고, 부와 재물을 추구한다. 이미 충분히 가진 사람들, 무림으로 따지면 고수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도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와 무공은 같은 속성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단순히 피로 피를 씻는 무림의 투쟁으로 읽지 않고, 속고 속이기를 반복하며 신의나 신념보다 성공을 좇는 지금의 이 세상으로 읽어도 틀리지 않게 되는 이유다.


<사조영웅전>은 이렇게 묻는다.

"무엇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당연히 '사람'이다. 사람 그 자체에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은 이끌리듯 사랑받게 된다.

운이 좋다는 것은 그의 삶이 운을 부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운은 단순히 무작위로 찾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삶의 태도, 행위에 따라 찾아오는 것이 운이기도 한 거다.


곽정은 그저 몽고의 촌구석에서 자란 순박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으며 단순한 소년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마주하는 시련과 사건들이 그를 한 사람의 영웅으로 키워낸다. 혼자 그 자리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 많은 어려움들을 혼자 힘으로 극복한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그의 '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그의 편으로 만든 힘은 솔직함과 단순함, 다른 사람을 믿어주는 진심 어린 믿음이었다.


시대가, 혼란이 영웅을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영웅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애쓰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영웅이 필요하지 않은 시기는 없다. 그 시기가 혼란스럽건, 평온하건 관계없이 모든 시대는 나름의 영웅을 기다린다.

그 영웅이 세계와 세상을 구원하지 않아도 좋다.

단 한 사람의 영혼, 단 한 명을 위해 존재한대도 그 영웅의 가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영웅의 풍모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영웅들에게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그 감동은 작위적이지도 않고 계획된 것도 아니지만 깊이 남아 오랫동안 삶에 영향을 끼친다.

중 2병이라고 하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영웅을 꿈꾼다. 세상을 구원하지 못해도 좋다. 다른 사람까지 구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 하나, 나 자신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는 영웅이고 싶다. 시대를 바꾸고 혁명을 이룰 수 있는 영웅이 위대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영웅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대가 불운하며 혼란스럽다는 증거다. 나는 그런 영웅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절세 고수가 아니어도, 나 역시 영웅이고 싶다.

세계를 구하고, 우주를 지키지 못해도 좋다. 작은 세계, 두 팔을 벌린 만큼의 세계만이라도 지켜낼 수 있는 그런 존재이고 싶다.


무협지의 힘은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꿈꿔도 좋은 세계, 그것이 무림이다. 피와 원한 복수만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우정 또한 넘치는 그런 세계가 무협의 세계다. 편견은 우리의 세계를 더 좁힐 뿐이다. 영웅은 품는 존재, 포용하는 존재가 아닐까.

나 스스로 영웅이 되는 것도 좋겠지만 또 하나 바라는 건, 나의 영웅을 발견하는 일이다.

황용에게 곽정이 만두 하나를 계기로 영웅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새겨지는 것처럼, 사소한 일, 작은 것에서 나의 영웅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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