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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Sep 19. 2018

[북리뷰] 우리, 너무 가까운 것만 보고 있지는 않나?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_나카지마 아츠시

최인아책방 북클럽 추천 도서

카페에 가면 늘 같은 자리에 앉는다. 그 자리에서는 왕복 2차선에 그려진 횡단 보도가 보인다. 신호등이 있지만 황색 점멸 신호뿐이다. 매일 지나다니는 사람 중에도 그 자리에 신호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으리라. 신호등도 횡단 보도도 그 정도의 의미. 언제든 어디서든 건너도 되는 길에 놓여 다만 형식을 갖추었을뿐인 정도다. 

 

 고작 형식뿐이라도 횡단보도에는 의미가 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황색 점멸 신호등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길 한복판으로 건너기보다 횡단보도로 혹은 그 가까운 데서 건너려고 한다. 운전자는 횡단 보도 주변에서는 언제든 사람이 도로로 나올 수 있음을 예측하며 지난다. 무턱대고 길을 건너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음에도 사고가 나지 않는 건 갖춰진 형식을 기반으로 공유하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다.


 도로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기에 보이는 게 있다. 좀 더 정확히는 떨어져서 조금 위에서 봤을 때 말이다.


"횡단 보도를 건너는 사람과 지나는 자동차는 얼마나 위태롭고 치명적 관계인가?" 

 그저 태연하게 멈춰서는 자동차의 운전자가 놀랍고, 그토록 대담하게 뛰어드는 보행자가 두렵다. 놀라움은 그런 상황에 놀라지 않음에서 생기고, 두려움은 태연함이 의미하는 일상성에서 느낀다. 보행자와 자동차의 위태로운 관계는 어디에나 있는 보편, 일상적인 풍경. 놀랍지도, 두렵지도 않은가?


 어떤 이들은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말하고 싶을 때 통계를 인용한다. 횡단 보도에서의 교통사고 확률은 예를들면 백만 분의 일이고, 그 사고에서 치명적인 상처, 예를들면 사망할 확률은 다시 몇 십분의 일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범하게 되는 심리적 오류는 그 백만분의 일 혹은 몇 십분의 일 확률의 당첨자가 '자신'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통계를 인용하지만 통계에서 자신을 제외하면서 통계의 희박한 확률에 의지하는 거다. 그러다 사고가 나면 "운이 나빴다"고 한다. 운의 문제였을까.


 가까운 게 잘 보이기 마련이고, 보고 싶은 걸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너무 가까운 것만 보고 있지는 않나?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제목처럼 역사 속 인물들, 중국 고전의 이야기를 뼈대로 지은 네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실제 역사의 기술인지 착각할 만큼 사실적이다. 최고의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미쳐 호랑이가 된 사람 이야기, 활의 명인이 되길 꿈꾸다 경지에 이르러 활이 무엇인지조차 잊은 사람 이야기, 공자와 제자 자로 이야기, 한나라 무제 때 장수 이릉 이야기.


 모두 아득한 먼 옛날의 이야기인 데다, 일상에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 이야기들이라 일본인이 재해석 한 중국 이야기까지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내놓을 대답이 궁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가까운 일이 아니기에 보이는 게 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추천하며 읽기를 권할 수 있는 거다.


 몇 군데 함께 생각해봤으면 싶은 구절을 적어본다.

 <제자>에서 도전하기 위해 찾아온 자로에게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말에는 채찍이, 활에는 활도지개가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도 방자한 성격을 바로잡기 위한 가르침이 꼭 필요한 것이라네. 틀을 바로잡고 갈고 닦으면 비로소 유용한 재목이 되는 법이지._71페이지

 느끼는 바, '배움'에 있어서 실용성을 우선하는 시기의 정점에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그걸 읽어서', '그걸 알면', '그걸 배우면', '그걸 생각하면' 따위의 뒤에 "뭘 할 수 있는데요?" 혹은 "뭐가 될 수 있는데요?"가 따라붙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다. 책이 외면 당하고, 도덕이 가치를 잃는 건 '아무 쓸모가 없어서'가 아닌가 말이다. 


 공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반드시 맞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어떤 쓰임'이 있을 때만 그 필요성이 인정될 수 있다. 사람 입장에서야 말이 유용하기에 굴레를 씌우고 채찍을 내리겠지만 그건 말에게는 수고로운 일이자 고통일 뿐이다. 유용한 재목이라는 것 역시 사람의 입장에서다. 재목이란 베어져 쓰임에 맞게 가공한 나무다. 사람은 쓰임을 얻지만 나무는 쓰러져 일단의 생을 끝내게 된다. 


 <이능>은 뛰어난 장수였지만 전쟁에 패해 병사를 잃고 흉노에 항복한다. 노한 무제 앞에서 이능을 변호하다 벌을 받게 되는 이가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사기 집필을 위해 치욕을 무릅쓰고 궁형을 택했다고 알고 있었는데(죽음, 벌금, 궁형에서 선택할 수 있었으나 죽고 싶었으나 죽을 수 없었고, 벌금을 낼 돈은 부족해서 궁형을 택했다고), 여기서는 선택보다는 '어쩔 수 없었던', '불가피한 운명'으로 그려진다. 죽음을 택할 수 있었으나 죽을 수 없었기에 궁형은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기를 완성한 게 정말 '사마천'일까 아니면 '사마천 이었던 사람'이었을까? 

처참한 노력을 1년 정도 계속한 후, 그제야 그는 삶의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도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기쁨만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_184페이지

 사마천이라는 사람은 죽어 없어지고 사기를 집필하는 '기능'만 남은 시간을 이어갔던 건 아닐까. 사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에서만 기쁨을 느끼는 삶. 그것은 살았던 게 아니라 살아진 게 아니었을까. 박경리 선생님이 토지를 집필하면서 느낀 심정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쓰고 싶다'가 아니라 '써야 한다'는 마음으로 '쓸 수 밖에 없었던' 시간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이능 자신도 흉노에 항복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고국에 바친 충성과 그에 대한 고국의 보답을 생각하면, 아무리 무정한 비판자라 하더라도 그 '어쩔 수 없었던' 것을 인정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한 남자가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앞에 두고도 결코 자신에게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_209페이지

 이능이 아직 항복하기 전, 잘못된 사실이 전해져 한나라에 남아있던 어머니와 부인, 자식들이 몰살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절망한 이능은 흉노 선우의 항복 제의를 받아들여 선우의 딸을 부인으로 삼고 우교왕의 지위를 얻는다. 이렇게 항복한 이능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 있으니 소무라는 사람이다. 소무는 이능의 20년 지기 친구로 항복의 권유에 응하지 않은 채 19년 동안이나 나라와 주군에 대한 지조를 지킨다. 자신처럼 가족 전부가 몰살당한 건 아니지만 비슷하게 억울한 처분으로 죽음을 맞은 형과 동생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했다. 풀려날 거라는 기약도, 누군가 그의 지조를 알고 기억해줄 거라는 확신도 없었지만 소무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음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거다. 


 '보통 사람인 나'는 많은 선택의 순간, 갈등, 고민과 마주했을 때 어쩔 수 없는 이유를 찾기에 열심이었다. 이능의 선택이 틀렸고, 소무의 선택이 옳았다는 이분법식 정답 찾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실리를 위한 선택에서의 '어쩔 수 없는'이 아니라 자기 선택의 순간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자아 없음'의 '어쩔 수 없는' 때가 압도적으로 많지는 않았던가. 눈에 보이는, 수치화 가능한 가까운 것들을 선택, 판단의 기준 삼지는 않았나.


부끄러움에 그치지 말아야 하건만 늘 부끄럽기만 하다.


이 부분은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데미안>을 떠올리게 하기에 적는다.

그것은 '의리'라든가 '절개'라든가 하는, 밖에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억누르려고 해도 억누를 수 없이 용솟음쳐 나오는 가장 친밀하고 자연스런 애정_211페이지

소무와 이능이 다른 선택을 하게 된 결정적 차이를 말하는 부분이다. 이능은 장수로서의 임무, 군주와 조국을 향한 의리로서 항복을 거부하고, 성과를 만들어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소무는 의리나, 절개, 임무를 떠나 순수하게 솟아나는 애정으로 긴 시간을 견디고 이겨낸다. 약한 내면은 간단히 흔들리고 휘둘리지만 단단한 내면은 외부의 조건들, 힘으로 파괴할 수 없음을 일깨우듯.

 소무는 칭송받을만 하다. 그리고 위대하다. 하지만 괴로움 끝에 타협한 이능은 비난받아 마땅한 걸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충성의 기회, 가족까지 모두 빼앗긴 후에도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 영원히 유효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금은 이능을 괴롭힌 사회와 사상, 제도적 얽매임을 냉정히 돌아봐야 할 때 아닌가.


 톨스토이 단편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다시 읽어보려다 책장에 꽂는다. 왜 고전을 읽는가? 질문은 하나지만 답은 무한하다. 다만 단순히 이것 하나만은 생각해보자. 옛날, 아주 오래된 옛 이야기가 전혀 다른 시대, 세상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 울림을 남길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발 아래를 살피며 걸어가면 돌부리에 채이거나, 혹시라도 있을 구멍에 빠지는 건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조금 멀리, 종종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지 않으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아주 오랜 후에야 도착할 수도 있다. 아주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꼭 도착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그것도 그렇다. 그러나 그 결과를 '어쩔 수 없는' 그 어떤 힘에 맡기지 말았으면 한다. 어쩔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하기를.


 세상은 돌고 돌아 제자리에 닿는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가 그 역사 속에서 걸어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상상, 제법 흥미롭지 않은가.


- 북큐레이터 서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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