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물었다. "책을 읽으면 문해력이 좋아지나요?"
종종 그런 질문을 듣는다. 책을 많이 읽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지를 묻는.
그러면 나는 되묻는다. 왜 책을 많이 읽고 싶은지.
돌아오는 대답은 책을 많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막연한 이야기나 특정 장르를 너무 편식해서 읽는다거나 얼마 전 이슈가 되기도 했던 문해력을 키우는데 독서가 도움이 된다더라거나 하는 식이 대부분이다.
정말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따로 있지만 한 때 '어느 정도 많은 책'을 읽기도 했던 한 사람으로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답은 역시 "책을 많이 읽는 게 정말 중요한 건 아니다."라는 원론적인 얘기다. 책을 많이 읽어서 지식을 얻을 수도 있고,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커질 수도 있고 등등 효과를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은 지식을 얻는 게 목적이라면, 시간을 보내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할 필요가 없는 시대다. 문해력 문제도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효율이 높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해력이란 결국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에게 달린 문제니까.
굳이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다면 '많이'에 집착할 이유가 없어진다. 많이 읽으나 적게 읽으나 시간은 간다. 많이 읽고 많은 걸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간의 기억력이란 많이 넣는다고 많이 남도록 생겨먹지 않았다. 책 읽기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무리하지 않으면서, 꾸준히 해내는 게 제일 중요하다.
문해력이 문제다. '심심한 사과'를 '깊은 유감'이 아니라 '사과가 심심하다고?'로 해석해 발끈한 사건이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기도 했다. 특정 세대, 연령 대를 겨냥해 교육의 문제가 지적됐고 거듭 내놓는 대책이 책을 읽어야 한다거나 영상에 지나치게 치중한 결과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 지적, 비판의 대부분은 소위 배운 사람들이 했는데 당연히 비판의 대상보다 연륜도 있고, 여유도 있는 사람들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심심한 사과'가 논란이 됐다는 사실에 당황하기도 했다.
"심심한 사과를 모를 수도 있구나." 새삼 놀랐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굳이 '심심한 사과'를 해야 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관습적으로, 관행적으로 쓰는 용어라 일상생활에서 쓰거나 접할 일이 없던 이들이 잠시 어리둥절할 수 있는 부분인 거다.
심심한 사과 문제의 초점 대부분이 '심심한 사과'의 의미를 모르니 그걸 알게 해야 한다에 맞춰졌다. 비판도, 진단도 '모르는 것이 문제라 그걸 알게 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정말 문해력만의 문제였을까?
심심한 사과 사건의 문제는 층위를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1. 굳이 '심심한'이란 말을 써야 했는가.
2. '심심한'을 심심하다로 해석해야만 했는가.
2번은 다시 더 쪼개볼 수 있다.
1. 발언한 사람의 상황을 알고 있었는가(사과하는 상황)
2. 사과하는 사람이 비아냥거리듯 심심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3. 사과하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도 심심하다고 판단했다면 이것은 문해력의 문제인가 이해력의 문제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사전에 '문해력'은 명사로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경우는 드무니 이해하는 능력에 초점이 있는 셈이다. 앞선 '심심한 사과'로 돌아가보면 심심한 사과 발언 놀란은 발언자가 사과하는 상황이었음을 인지한 사람들 중에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의미는 단순히 발언을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니라 발언자의 의도를 잘못 해석했다는 게 된다. 비아냥 거리듯 사과할 수 있다는 판단, 확신이 정당하게 화를 내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왔을 거다. 글자의 이해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사람의 이해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가.
글 읽기, 책 읽기를 가르쳐야 한다는 진단이 씁쓸한 건 이 지점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단어의 의미를 공부해서 알게 된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혹은 오해한다면 문해력이 향상됐다고 해서 문장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될까. 책을 많이 읽는다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생각이 다양해지는 게 아닌 것처럼 한자를 가르치고, 단어의 의미를 학습한다고 해서 어떤 발언, 통신문의 단어들을 잘못 해석해서 문제가 되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만 같다.
물론 더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 문해력의 문제에서 오는 인간 오해의 사건도 줄어들겠으나 그보다 왜 다른 판단보다 앞서 심심한 사과는 비아냥일 것이라는 확신이 굳건히 흔들리지 않고 댓글을 작성하는 순간까지 이어졌느냐를 되짚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르치면 더 많이 나아질 거라고 믿어왔다. 그리고 그 믿음은 거의 틀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많이 배운 사람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좀처럼 우리 외의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어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악의가 득세하고 사기가 만연해서 쉽게 누구를 믿어볼 시도조차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충분히 안전하고 호의로 넘쳐흐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역시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도 아니고 모두가 그럴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하길 바라고 소원할 뿐.
문해력 문제는 상호 이해의 문제가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한쪽에서는 교육의 문제라고 진단하고 간단히 해결하려고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것만으로 해소되지 않을 응어리를 지닌, 서로가 다른 풍경을 보고 다른 진단을 내리다 보니 이해하지 못하게 된 지점에서 더 극대화된 몰이해가 만든 사건.
문자의 이해, 글자의 이해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상황에 공감하는, 그런 공감 능력을 키워낼 수 있는 시간과 기회에 대한 언급, 제안도 늘어나야 하는 게 아닐까.
아직 아는 단어도, 잘 알아듣는 말도 적어서 번번이 실수하는 아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