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 살인자의 성모_페르난도 바예호
이 책에서 뽑은 두 문장.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나거든_57p
더 심한 가난이 있는 곳에 더 많은 살인자가 있고, 더 많은 살인자가 있는 곳에는 더 많은 사람이 죽어_125p
고향 콜롬비아를 떠나 살다가 돌아온 페르난도의 1인칭 시점에서 기술되는 이야기다. 사실 나는 콜롬비아를 거의 모른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남아메리카에 있는 나라로 커피 산지라는 사실 외에 알고 있는 게 없었다. 소설을 읽고 난 후 이전보다 더 알게 된 건 하나뿐이다. 정확히는 언젠가 해외 뉴스에서 한동안 떠들었던 마약왕의 이름이 파블로 에스코바르라는 사실이다.
사실.
그렇다.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에는 지극히 사실적이다. 거의 모든 소설이 현실을 다르게 비추고 있을 뿐이라거나 그림자 같은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오히려 몹시 현실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느낌을 준달까.
소설의 화자 페르난도가 고향으로 돌아온 건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 사후다. 마약왕이 사살당함으로써 그가 낳은 폐해와 비리, 갈등이 끝났어야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선하게 돌아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히려 축을 잃어버린 힘들은 폭주를 거듭했고 소설 속에 펼쳐진 살풍경처럼 삶이 우스워지고 죽음이 흔해지는 세상이 열린다. 소설은 제목처럼 sicario, 청부 살인자들이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다르게 적으면 청부 살인자들에게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사연이 끝없이 이어지는 마치, 죽기 위해 등장한 인물들의 인명록처럼 읽힌다. 소설 속 청부 살인자들은 목적을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한때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사람을 죽이던 이들이 자신들을 고용할 사람이 사라지면서 가치를 잃는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내려와 지금까지의 잘못을 뉘우치고 오늘부터 피에 묻은 손을 씻고, 심장과 미간을 관통하여 생명을 빼앗던 총과 칼을 손에서 내려놓기보다 거슬리거나 시끄럽거나 범죄자 거나 범죄자가 될 생명들을 천국으로 보내는 일을 거듭한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겠지만 공권력은 마비되어 기능하지 못했고 치안은 혼란의 끝에 이르러 있었다. 길에서, 식당에서, 버스에서, 아파트에서 수시로 사람이 죽어나가지만 누구도 수사하지 않았고 처벌받지 않았으며 뒤쫓거나 보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피로 씻는 복수가 살인자를 살해당한 자의 자리로 옮겨놓는 일을 거듭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는 성모조차 본래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렸다. 살인자들이 자신의 살인을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으며 자신이 쏜 총이 상대를 맞춰 빗나가지 않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총알은 피해 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180개의 성당이 모두, 하나 같이 타락해 있었다.
정말 어렵게 읽었다. 책 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거나 중간에 읽기를 그쳤을 그런 소설이었다. 1인칭 화자의 시각, 사고, 경험에 의지해 거의 알지 못하는 나라의 공감하기 힘든 세계의 풍경을 더듬어 나가야 했다. 축축하고 고르지 않은 어둡고 어두운 동굴을 아주 흐릿한 불빛, 촛불 하나 정도를 밝혀 걷는 기분이랄까. 초반부는 유독 산만하고 읽기 어려워서 몇 번이나 읽던 자리를 잃고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가기도 했다. 초반을 벗어나 화자의 성격, 취향, 경험을 조금 알게 된 다음에는 한결 읽기 수월해졌지만 등장인물이 등장과 동시에 쉬지 않고 죽어나가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소설이 말하는 바는 추측 가능했다. 실제로 마약왕이면서 국회의원까지 했다는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이야기를 모르더라도 콜롬비아를 비판하며 처벌받지 않는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부패를 꼬집는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는 걸 보면 거의 모든 세상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비리와 카르텔의 근원이 사라지지 않는 것에 절망한 사람들의 역설적 고백을 들려주려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난다거나 더 심한 가난이 있는 곳에 더 많은 살인자가 있다는 앞서 적어둔 문장처럼 희망 없는 땅, 세계에 태어나 선택지조차 얻지 못하고 아직 어른이 되기 전 가장 순수한 시기에 가장 잔혹하게, 처참하게 타락하는 영혼들의 슬픔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얼마나 다른가. 부패한 정치인, 살인자, 범죄자들의 정당하고 합당한 처벌을 기대하며 그 기대가 충족된 세계에 살고 있는가? 수십 년 넘게 이어진 정치의 세계에서 그런 기대가 온전히 이루어진 날은 없는 것만 같다. 길을 가다 단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미간이나 심장에 총알이 박혀 죽게 되지는 않더라도 이 세계 역시 해소되지 않는 부당한 죽음과 희생으로 가득하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누구도 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게 진리일지라도 누군가에게 죽는 것이 진리는 아닐 테니까.
밝은 이야기가 좋다. 이 세계의 어두움, 혼란, 뒤틀림을 자각하게 하는 소설의 자극도 가끔은 필요하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우리 마음이 머무는 심장에도 영혼이 머물지 모르는 머리에도 해로울 테니까.
이 세계는 너무 많은 자극으로, 나날이 강해지는 자극으로 가득하다. 소설, 영상, 만화, 농담까지 그렇다. 아주 잠시라도 홀로 평화로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게 좋겠다.
부디 평안하기를, 이 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