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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Oct 05. 2023

순한 맛 고도를 기다리며

기다리고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려도 오지 않는 이방의 적에게

사람은 무엇에든 기대어 산다고 한다. 사람에 기대거나 기대에 기대거나 하면서 말이다. 때로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은 절망이나 슬픔처럼 무겁고 어두운 감정에 기대어 어떤 기적적인 구원을 바라기도 한다. 벗어날 수 있는 기회, 선택을 앞에 두고도 어쩌면 벌어질지 모를 막연하고 희박한 가능성을 이유로 유예하며 삶을 낭비한다. 처음에는 권유와 의무감으로 나중에는 지금까지 기다리며 보낸 시간이라는 기회비용을 포기하지 못해 인생 전부를 의식의 흐름이라는 관성에 내어주는 것이다. 디노 부차티 소설 <타타르인의 사막> 속 조반니 드로고 중위처럼 말이다.


 장교로서 화려한 미래를 꿈꾸는 조반니 드로고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임명되어 첫 부임지로 향한다. 조반니의 여정은 처음부터 불길한 예감을 품게 한다. 언제 벌어질지 모를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거라는 불안이나 그 전쟁을 통해 공을 세워 금의환향할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불안과 기대 모두에 의구심을 일으킬만한 상황이 이어지는 탓이다. 쉽게 찾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던 요새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불안한 마음에 지나는 사람들에게 요새에 대해 물어도 아는 이가 없다. 어떤 이는 근처에 요새는 없으며 오래전에 폐쇄됐다고 단언한다. 조반니의 불안한 여정은 한 대위와 마주치며 끝나는 듯했지만 기대도 긴장감도 없는 대위의 태도는 아직 불안이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중간에 만난 대위와의 동행으로 무사히 요새에 도착하지만 바스티아니 요새는 낡고 쓸쓸하며 고요할 뿐이다. 지휘관과의 면담으로 자신의 부임에 약간의 착오가 있었음을 알아차린 조반니는 도시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지만 일이 복잡해질 거라는 소령의 설득에 잠시만, 단 넉 달만 요새에 머물기로 한다. 낡은 요새, 총안 너머로 보이는 넓은 사막, 타타르인이라 부르는 외인과의 전쟁 가능성. 이것이 바스티아니 요새에서의 기다림의 시작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인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어느 저녁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길을 배경으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라는 인물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고도'를 기다리며 끝이 난다.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로 시작되어 끝나버리는 이야기. 디노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은 그 고도의 향기를 물씬 풍긴다. 작품 속 인물의 막연하고 막막한 마음, 기대, 긴장감과 허탈함까지 닮았다. 다만 맛에 비유하자면 <고도를 기다리며>보다 순한 맛이랄까. 기대 섞인 가벼운 긴장과 그런 기대를 저버리는 무사함(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이 페이지에서 페이지로 이어지면서 어느 순간에는 종이의 흰 빛깔에서 노란 사막의 먼지 같은 텁텁하고 깔깔한 맛이 느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타타르인의 사막>은 몇 개의 문장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사람들은 홀로 있을 때 무언가를 믿기가 어려워진다. 누군가와 그 얘기를 나눌 수도 없게 된다. _235

 장교로서 성공을 기대하며 첫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향하던 조반니 드로고는 불행히도 찾아든 우연한 착오로 요새에 고립되지만 나중에는 자의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선택을 거듭한다. 그러면서 가족과도 친구와도 사랑과도 멀어지며 혼자가 되는데 아이러니한 건 같은 요새에 비슷한 생활을 하는 동료, 부하, 상사들과도 대화를 나누거나 교류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거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요새를 향해 공격해 들어올 타타르인, 외인을 대하듯 경계하고 거절하며 경쟁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점점 더 믿기 어려워지고, 믿기 어려운 사람과 대화할 수 없게 되고, 가장 믿었던 사람조차 그와 다르지 않게 되어가는 거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번 새로운 체계를 따르고, 새로운 비교조건을 찾으며, 상황이 더 나쁜 사람들을 보고 위안받을 필요가 있었다. _248

 결국 위안받지 못한 영혼은 뒤틀렸지만 쉽게 찾을 수 있는 방향에서 위안을 찾게 되는데 자신보다 더 못한, 어려운 사람들, 사고 혹은 불행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안위를 확인하며 안도하는 것이다. 그런 위안과 안도가 이어질수록 다른 사람도 자신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마음이 불안과 경계를 부추기고 강화하면서 더욱더 웅크리게 하고 단단하게 틀어박히게 만드는 것이다. 점점 더 악화하는 상황에서 더 나쁜 비교조건을 찾는데 삶을 소모하며 처음의 열정이 사그라드는 걸 외면하는 것이다. 

"좋아." 시메오니가 짜증스럽게 맞받아쳤다. "난 도와주려고 했을 뿐인데, 자네는 이런 식으로 나오는군.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한 셈이야._267

진정한 도움, 호의는 거절에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만약 나의 호의를 누군가 거절했을 때 마음 상하고 기분이 나쁘다면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는 호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떠올려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좋은 이미지를 새겨두고 싶어서, 혹은 외부에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만들고 싶어서, 호의를 받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소위 빚을 지워놓으려는 계산이 있었다면 그건 호의지만 호의가 아닌 것이다. 사람에게는 오감을 넘어선 감각, 육감이 분명 있어서 때때로 증거보다 더 명확하게 상대방의 진의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타타르인의 사막>은 빛바랜 사막을 그린 그림처럼 굴절되고 일그러진 감정들,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하다. 적이 없으면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는 공간과 그 공간이 사라져 버리면 공간과 함께 가치를 상실하는 사람들이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을 두고 기다림이라고 하고,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잡기 위해 여기 있어야 한다고 서로를 다독이며 조용히 죽어가는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건 변화를 선택하는 것보다 쉽다. 받았으므로 책임이 없다고, 어쩔 수 없다며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가. 선택의 기회를 얻는 것도 기회를 만드는 것도 몹시 어려운 법인데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가 버겁고 두려워 안주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이 최선이라고, 언젠가 그날이, 그 기회가, 결정적인 순간이 기적같이, 또렷하게 도래할 것이라고. 


 외인은 오지 않는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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