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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Sep 23. 2023

혁명인가 시대착오인가

브렉시트와 소설가의 우화

숨은 거미줄 찾기

 거미는 사람이 다니는 길에는 거미줄을 치지 않는다. 처음 두세 번은 치더라도 그 실수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 거다. 마치 최적이면서 최선인 경계를 알아내는 능력을 갖춘 것처럼 빠르게 학습하는 모습을 보인다. 더하여 처음 자신의 거미줄을 끊어낸 사람의 행위가 실수인지 고의인지까지 알아차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만큼 적절하고 효율적이며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생물 가운데서도 지적 능력이 뛰어남을 자부한다. 합리적이며 이성적이고 다양한 수단과 과정을 활용해 학습하며 적응하며 지배하는 우월한 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미물, 해충이라 부르는 인간 외의 많은 생물들은 뛰어남이 없는가? 그들의 행동, 건축, 생태에서 착안한 무수한 발명품과 기술들은 단지 인간의 뛰어난 지적 능력, 사고력이 만들어 낸 결과물인 걸까? 오로지 인간만이 뛰어나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시각이 있다. 인간의 오만함, 특정 세계의 오만함, 특별 계급의 오만은 때로 인간 세계를 넘어 더 큰 세계를 위협한다. 인간은 그 뛰어난 학습, 사고, 사유 능력을 더 관대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다만 숨 쉬는 연명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앞말이 너무 길었다. 이야기를 시작하자.


 <바퀴벌레>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견했을 때 "뭐지?" 싶었다. 작가가 이언 매큐언이란 걸 알았을 때는 "으잉?" 했고 첫 문장을 읽으며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렸다.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_13 페이지

첫 문장에 앞서 작가는 '티머시 가턴 애시에게'라고 썼다. 티머시가 누구인지 작가나 역자의 주석은 없다. 한 페이지를 더 넘겨서 이렇게도 남겼다.

 이 소설은 허구다. 이름과 인물들은 작가가 상상해 낸 것이며, 현존하거나 세상을 떠난 실제 바퀴벌레와 유사점이 있다면 전적으로 우연이다. 

 마치 추리소설처럼 던져진 단서를 따라 본문에 닿으면 작가의 의도가 저절로 보이는 것이다. 앞선 문장을 바꿔 적으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이 소설은 현실이다."

 

 소설 첫 문장의 '거대 생물체'는 인간, 영국의 총리다. 지난밤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총리의 몸을 차지한 바퀴벌레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2019년 출간된 이 소설은 영국의 '브렉시트'가 큰 배경으로 작용하는데 '역방향주의'라고 하는 기존의 경제관념을 거꾸로 돌리는 행위가 가져올 혼란과 가능성을 예견하면서 정치의 민낯을 풍자한다. 이 소설은 이언 매큐언 소설 중에서 적게 팔린 편에 속하는 듯 보이는데 그 이유는 아마 주제와 소재, 제목의 영향일 것이다. 사랑도 없고 로망도 없는, 비현실적인 동시에 현실적이지만 우리 이야기라고 하기엔 너무 먼 이야기라고 느낀 게 아닐까. 소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다른 얘기가 있다.


 글을 시작하며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자리를 바꾸는 이야기를 썼다. 거미줄이 끊기는 걸 경험한 거미 당대에만 유효한 미시적인 지식, 경험은 어떻게 다음 세대 거미에게 이어질까. 그건 적응일까 진화일까. 인간으로 보면 학습하는 인간은 진화한 걸까 적응한 걸까. 인간은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어떻게 전해주고 이어가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고 세상에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없다고 하는데 우리는 왜 늘 처음처럼 당황하게 되는 걸까. 다음 세대로 이어갈 만한 지식과 경험을 습득할 수 있는 그 무수한 경로가 있음에도 성공과 실패는 극명하게 나뉘어 좀처럼 자리가 바뀌지 않는 걸까. 정말 누군가는 바퀴벌레에게 몸을 빼앗긴 게 아닐까.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첫 문장에 앞서 작가가 언급한 고유 명사의 인물 '티머시 가턴 애시'가 누구인지 궁금해져서 찾아봤다. 검색되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다르게 찾아봤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찾아낸 인물의 이름은 '티모시 가튼 애쉬'다. 의문을 제기하기 좋아하는 나는 한 가지 궁금증을 떠올렸다. 왜 초보 번역자도 아닌 노련한 번역자가 찾을 수 있는 고유 명사가 아닌 자신이 만든 고유 명사로 해석해 뒀을까. 편집자가 조금 친절함을 발휘해서 주석을 달아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 영문 모를 정치와 영국 사회 풍자가 아니라 현실 정책의 우화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금 더 단서를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 그런 별 것 아닌 생각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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