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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May 05. 2021

죽음은 도피처가 아니다.

거의 모든 것이 살아있음으로 가능해진다.

나이 든다는 건 가까운 데서 죽음이 흔해진다는 거다. 이 지점에서 어떤 착각에 빠질 수도 있는데, 주변에 죽음이 흔해진다고 해서 죽음을 더 가깝게 느끼게 되는 건 아니다. 말장난 같지만 진심이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죽음이 흔해진다고 해서 실감하게 되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다른 예를 들자면 사기를 당해보기 전까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사기를 당할 수 있어?"

그런데 사기를 당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기당하는 사람이 나는 아닐 거라고 믿었다."라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이반 일리치라는 남자의 죽음과 그 전후의 이야기다. 우선 제목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리며 시작하는 이 소설은 첫 페이지에서 한 번 더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라고 쐐기를 박음으로써 살아날 가망이나 희망을 애초에 허락하지 않는다. 삶의 가능성 없이 오직 선고된 사망을 완성해 내는 이야기인 셈이다. 

 세상을 살고 있는 '산사람'인 우리에게 죽음이 확정된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게다가 젊고 건강하며 활기에 차서 죽음과는 영영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이 이 책을 발견한다면 펼쳐서 읽고 싶어 질 수 있을까? 솔직히 별로 없을 거라 생각한다.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반응이니까.


 나는 무단횡단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생의 시기를 따라 이유는 조금씩 달라졌지만 무단횡단을 하지 않는다는 겉으로 드러난 태도는 같았다. 처음에는 '무단횡단은 법을 어기는 행위'라서가 더 컸다. 하지만 나중에는 '죽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았다. 무단횡단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최대한 주변을 살피고 조심해서 길을 건넜다. 파란불이라고 해서 무작정 건너는 일도 없었다. 살고 싶어서다.

 이런 태도, 마음가짐의 변화에는 계기가 있었다. 정말 가까운 사람, 도저히 주변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 무단횡단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주변에서 그렇게 자주 듣던 주변의 죽음이 내 삶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게 된 다음부터, 나는 그 사건을 일으킨 원인 행위를 그만두기로 했을 뿐 아니라 그 일을 막을 수 있었을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같은 일을 겪었다고 모두가 같은 태도의 변화를 겪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잊어버리고 반복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의 일은 아니라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다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선택한 것뿐이다. 세상이 살만하거나 살맛이 나거나 즐거움의 연속이어서가 아니어도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허망하게, 누군가를 가해자로 만들면서, 처참하게 마지막을 맞이하다니. 절대 싫었다.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살다 보니 언제부턴가 "보통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다"거나 "보통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보통이 아닌 인간으로 사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다. 당연히 일탈도 있고, 반성도 하고, 그런 날들이 반복됐다. 완벽한 인간이길 바란 건 아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예측 가능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적어도 죽음에 관해서만큼은 말이다.


 여러 번 읽었어도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이 이번에 떠올랐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확실히 예측 가능했다는 점이다. 이반 일리치는 교통사고나, 자살로 죽지 않는다. 확실하게 어떤 병인지 밝혀지진 않지만 발병 후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충분히 돌아볼 수 있었다.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는 점이 좋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후회할 시간도 없이 한 순간에 끝나는 게 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반 일리치가 서서히 죽어가면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운이 좋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이반 일리치 본인에게는 전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결말이겠지만, 어디까지나 관찰자이자 독자인 내게는 그렇다는 거다.


  어떤 죽음은 그 죽음 당사자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영원히 변하게 만든다. 보통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타산지석이라는 고사성어가 있고,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세상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따져보면 누구도 보통의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할 텐데, 그 순간이 왜 특이점이 되지 못하는 걸까.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에 그 이유가 있다. 톨스토이는 2장을 시작하면서 이반 일리치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그 평범한 삶이 끔찍한 것이었다고 덧붙인다.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끔찍한 것이라니. 

 나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다 평범하게 죽는다. 그리고 사람은 보통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 변호하기 마련이다. 왜 이렇게 사는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얘기하기를 택한다. 오히려 되묻는다. "평범한 게 뭐가 나쁜가?" 평범함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그 평범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 이후의 과정이 끔찍해지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나빴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게 위험한 거다.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생각할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바쁜 동안에는 떠올리기 힘든 법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당장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론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죽고, 자신도 사람이고, 그러므로 언제든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머리의 앎이지 실감은 아니다.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면 미쳐버릴 텐데, 그게 더 위험하다. 일종의 안전장치처럼 삶이 무사하고 무난하게 계속될 거라 믿는 게 보통의 삶이라는 거다. 나 역시 그렇듯이.


 이반 일리치가 잘못 살았다고, 잘못 선택했던 거라고 머리로는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다거나 혹은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삶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4개월이라는 시간을 가졌던 이반 일리치가 부럽다고 느낀다. 


 나는 최대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며 살고 싶다. 이반 일리치처럼 우연한 실수로 사다리에서 미끄러져 옆구리를 부딪히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원인이 되어 죽고 싶지 않다. 더욱이 가까운 이들이 조금도 준비할 수 없는 죽음도 싫다. 오래전부터 그런 죽음이 싫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싫다. 부주의 건 아니건 그런 일들이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늘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조심스럽다. 자신의 죽음도 조심스럽고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얘기하는 건 더 조심스럽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죽음이 도피처는 될 수 없다는 거다. 물론 이건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적은 것이라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다. 적어도 나 자신은 죽음을 도피처로 삼지 않겠다는 선언 같은 거니까. 어떤 것은 죽음으로써 가능해지지만 거의 모든 것이 살아있음으로 가능해진다. 


 다들 잘 살았으면 좋겠다. 죽음을 생각할 때면 늘 그런 생각에 닿게 된다. 

부디 다들 잘 살아주세요.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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