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가책방 Apr 29. 2021

우리에게는 두려움을 두고 올 어딘가가 필요하다

<나의 두려움을 여기 두고 간다> 편애하는 감상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길이란 건 물리적이거나 상징적으로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 때로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특별히 어떤 것이 두렵다고 말하기 어려운, 막연한 두려움이 더 두려운 순간들 말이다. 

 

 정도와 빈도, 강도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두려운 순간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그렇게 하루하루 단단하고 견고하게 쌓인 시간에 우리는 인생이라는 제목을 지어 붙이곤 한다.


 서울을 떠나 공주에 정착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지난 몇 년이 지금 생각해보면 한 순간만 같다. 신기한 건 무수히 맞닥뜨리고 견뎌내고 이기고자 했을 두려움들, 두려워할 만한 것들,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절대자의 보증, 약속은 없지만 이 삶이, 우리의 삶이 앞으로도 무사히 이어질 거라고. 그 삶을 이어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오래, 꾸준히 하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매일 한다.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더 단단해졌을까. 누군가는 웃겠지만 오늘의 나는 몇 년 전의 나보다 더 유연해졌다. 단단해진 것 같지는 않은데 더 잘 견디고,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게 됐다. 스스로에게 기대하고, 스스로 그 기대가 아주 헛것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게 된 거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일들, 오늘 걷고 숨 쉰 시간들은 모두 기적이다. 

  




 인터뷰에서나 사람들이 "왜 공주에서 책방을 하게 되었느냐"라고 물으면 "어쩌다 보니 하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하곤 하는데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운명에 순응한 결과"가 된다.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단 한순간도 제대로 가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던 삶이 책의 페이지들을 넘기다 만난 사람들 덕분에 달라졌기 때문이다. 

 

 책과 사람이 어우러졌을 때 만들어낼 수 있는 예측 못한 기적. 그게 오늘 나의 모든 순간이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란 걸 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종종 느낀다. 책만 있어도 안 되고, 사람만 있어도 어려운 어떤 일이 적절한 책과 적당한 사람들이 완벽한 시간에 만남으로써 시작됐다. 표현을 했거나 하지 못했거나 그 후로 그 사람들을 오랜 시간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지낸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지나친 욕심인지 모르지만 가가책방이 그런 공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가가책방에는 책을 팔지 않던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끝낸 건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라는 책인데, 나름 까다로운 기준으로 파는 책과 팔지 않는 책, 팔지 않을 책을 구분하던 시기였기에 파격이라면 파격이었다. 하지만 별로 파격일 것도 없이 간단히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책 속에 담긴 사람 얘기와 그 메시지가 좋아서다. 작가가 촌철살인, 돌직구성 조언으로 흐리멍덩한 정신을 깨워준 은인 중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인 것도 있지만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전개였다. 

 더 좋았던 건 책을 사 가거나 선물했다는 사람들에게서 돌아온 반응이었다. 좋은 책은 좋은 사람만큼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니까.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하정


 이 모든 장황한 얘기들이 '길을 잃는 것'과 '두려움을 두고 올 어딘가'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글이나 책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털어놓는 건 조금 껄끄러울 수는 있어도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어떤 관계와 과정을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됨으로써 길을 찾게 되는 이야기를 경험하고 기록하기는 쉽지 않다. 보통의 경우에는 무엇이 두려웠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이 지나면서 두려움에 익숙해지거나 두려운 상황이 저절로 끝나버려서 깨달을 기회도 갖지 못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길을 잃는 것도 마찬가지다. 보통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기 쉽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며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는 거라며 예민해지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살아가는 거다. 


 나는 오래전 "인간은 왜?"라는 질문 속에서 길을 잃었다. 겉멋이기도 했고,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던 사춘기 때였기도 했기 때문이었을 텐데 문제는 사춘기가 지나간 후에도 그 질문이 해소되거나 흐릿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간이기에 자비롭고, 인간이라서 불완전하고, 인간이라서 잘못을 저지른다."는 모순. 인간적이라는 게 뭔가? 그런 의문이 매일,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끝이 없는 고리를 끊은 게 책과 사람과 돌직구성 조언이었다.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세상을 내려다보거나 세상 사람들을 한심하게 바라보거나 하찮게 여길 수 있을 만큼 고결하지도 않았다. 나만 삶을 두고 고민하는 게 아니고, 고민만 한다고 풀리는 게 삶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르고 온 세상 근심을 홀로 짊어진 것처럼 지내왔던 거라는 걸 비로소 인정할 수 있게 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돌아보면 그 시점이 '두려움을 두고 온 자리' 중 하나였다. 내가 중요하지 않은 존재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라거나, 내 고민이 사실은 사소한 것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라거나, 그 비슷한 존재의 가치 없음에 관련된 두려움을 내려놓았던 거다.

   



 "나는 언제 행복한가?"

종종 듣는 질문이라 가볍게 여겼었지만 답하기 간단하지 않은 질문이라는 걸 깨닫는다. 사실 나는 보통은 행복한 편이라고 느낀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행복이 아닌 상태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까. 

 행복한 시간 중 하나는 사람과 연결될 때다. 직접적으로 어떤 고민을 마주 듣는 순간보다 책 속 이야기나, 제삼자와 함께 한 자리에서 비교적 객관적이면서 감정을 터놓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순간에 행복을 느낀다. 예를 들면 운영을 쉬고 있는 고전 읽기 북클럽이나 작가와의 북토크가 그런 순간이다. 연결되기 어려운 요즘, 이 시기를 살아내는 우리라서 더 간절한 그런 순간 말이다.

<나의 두려움을 여기 두고 간다>/하정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도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사실 지금 쓰는 건 <나의 두려움을 여기 두고 간다>의 편애하는 감상이다. 그런데 왜 책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느냐고? 

비록 소설은 아니지만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 않은 책들이 있는 법이다. 


'유난히 구름이 낮게 깔린다는 덴마크의 스반홀름이라는 공동체에서 머물던 기간에 있었던 일을 담은 책이다.' 

아, 이 얼마나 재미없고 밋밋한 문장인가. 사실이고 진실이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은 떨칠 수가 없다. 그래서 쓰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는 자신의 두려움을, 그 두려움이 무엇이었는지는 두고 간 그 사람만 알겠지만, 그 자리에 두고 갔다는 걸 발견한 사람이 있었고 그 발견이 책의 제목으로, 내용에 담겨 나에게 전해졌다는 결과는 분명하다. 



앞으로의 날들이 전혀 두렵지 않고, 걱정되지도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두렵기도 하고, 때로 걱정도 한다. 하지만 괜찮다. 나에게는 두려움을 두고 올 자리가 어딘가에 충분히 존재하니까. 걱정을 덜어줄, 든든한 사람이 있으니까. 혼자라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혼자 있으면 혼자가 되는 것이고, 혼자인 게 나쁜 건 아니니까, 혼자라고 느끼는 게 쓸쓸하거나 서글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은 어느 날 홀로 찾아간 가가책방에 내려두고 갔으면 좋겠다. 


 편애 섞인 감상을 오래 곱씹어 적으며 그런 생각을 하던 밤이 있었다.


담미(좌)와 메롱(우)

얘들은 모르지만, 고양이들을 보며 두려움을 잊는 날도 적지 않다. 좋은 일이고 고마운 존재다.

매거진의 이전글 싫은 소리 못하는 어른들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