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갑이 될 수 없는 근로자임을 깨우치며...
배를 타고 외국 항에 나와서 지금처럼 외항에 닻을 내리고 대기하고 있는 기간은 어지간해서는 세상 물정과 동 떨어져 세상 소식에 깜깜한 존재가 되어 버려 바깥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는 게 우리들이 처한 현실이다.
그런데,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이미 어느 정도 소문으로 알고 계시는 분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금번 회사에서는 선 기장의 정년을 현행 만 62세에서 만 58세로 조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미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치부하는 운을 띄우며, 현행 만 62세 정년의 선 기장 정년을 만 58세로 조정하기로 결정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내용의 공문이 유첨 사항으로 보낸 취업규칙 개정 동의서(정년 조정 동의서)를 작성 서명하여 보내 달라는 말까지 덧붙이어서 회사로부터 날아온 것이다.
말이 좋아 -정년 조정 동의서-이지 따지고 보면 <정년 축소 인정서>라고 이야기해도 될 문건이다.
새벽 운동을 하는 동안 내내 그 생각에 파묻히다 내린 결론은 두 말없이 회사가 원하는 동의서를 작성하여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기관장의 서명까지 받아 FAX로 보내며 도대체 지금껏 이런 이야기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우리 배와 함께 이 공문을 받는 배는 어떤 배들인가? 궁금증이 갑자기 들어선다.
수취인으로 지명된 배가 몇 척이 안 된다는 점을 보고 갑자기 생긴 궁금증에 E-MAIL로 온 수취인 명부의 배 이름을 적어 들고 승선자 명단을 찾아보니 이렇다.
모두가 지금까지 정해져 있던 취업규칙대로, 만 62 세의 정년에 가깝도록 근무하고 있는 나이 많은 선 기장들이 타고 있는 배들이다.
① AUTO ATLAS호 기관장 20기 E.B, P
②대우 스피리트호 선장 17기 H.T, J
③뉴 어코드 선장 19기 M.K, H기관장 18기 S.D, K
④뉴 다이아몬드호 선장 20기 Y.S, K
⑤뉴 조이호 선장 24기 H.M, K(동기생들보다 나이가 많음)
⑥오션 마스터 선장 20기 J.H, L
⑦오션 뷰티호 선장 15기 E.S, J
⑧오션 올림픽호 선장 16기 J.S, H
⑨오션 트레이 더호 선장 15기 C.h, I
⑩팬 노블호 선장 일반 LKN, K
⑪팬 리더호 기관장 15기 M.S, K
(기수는 한국 해양 대학교 해사대학의 기수이다.)
대충 훑어봐도 명퇴를 시킨다면 제일 먼저 거론되어야 할 사람들이 타고 있는 배에만 간 것으로 보인다.
3월 14일 현재 107 명의 동의를 받았다고 했으니, 먼저 젊은 선 기장들의 동의서부터 집중적으로 모두 받아 놓고 난 후, 최종적으로 우리들 늙은이(?)들의 동의서를 징구하여 시류에 맞춘 서류 구색을 가지려는 의도인가 짐작해 본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대세로 나에게 지워진 일이라면 발버둥 처 봐야 더욱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체면이나마 구해보자는 의미로 새벽부터(우리나라는 새벽 5시 30분) 동의서를 작성하여 발송하기로 한다.
또한 이어지는 공문의,
<금년에 이루어야 할 회사의 M&A를 위한 준비, 타 대형선사와의 정년 격차 해소 및 현실적으로 너무나 심화된 승진 적체 등을 일부 해소키 위하여 유감스럽게도 선 기장의 정년을 이와 같이 단축 시행키로 하되, 급작스런 4년 간의 정년 단축을 보완하기 위하여 일단 신 규정에 의한 정년퇴직을 실시한 후, 퇴직금과 정년퇴직 위로금을 지급받은 후, 일정 기간 계약 전문직(촉탁)으로 재기용하는 방안 등, 기득권을 최대한 인정할 수 있도록 심도 있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런 문구대로 잘 처리되어 나의 정년 시기였던 2004년 12월까지 촉탁이라지만 확실하게 근무할 수 있는 보장이 된다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동의서를 보냈다는 게 더 솔직한 내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지금 이곳 뉴캐슬 외항에 오션 마스터 호도 투묘 대기 중이라 그 배 선장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생각을 접어 두기로 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육상에서 근무하다 해상직으로 전직한 전력이 있는지라 이런 육상의 결정을 보며 나보다도 더 가슴 아플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서이다.
만감이 교차한다.
지난 IMF 때 주위의 사람들 중 이런 식의 일을 당했던 친구나 아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도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감회는 나의 일이 아니니 별로 피부로 느낌이 없었는데, 막상 내가 그런 일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는 현실이 믿기도 싫고, 억울하고 분통마저 터지는 심정이랄까, 뭐 대충 그런 씁쓸한 감회이다.
수긍하긴 싫지만 이미 황혼기에 접어든 시점에, 그동안 내 인생을 모두 투자하여 그 안에서 삶을 쌓으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남은 것은 공허한 허탈감뿐이라니......
진짜로 사람이 죽어 마지막에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빠뜨리지 않고 공평하게,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로 빈손인 채로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게 된다는 진리가, 이 시점에서 가지고 있는 모두를 빼앗긴 것 같아 드는 허탈 해진 마음에, 그나마 얼마나 위안이 되는 진리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승선 생활을 해오며 가졌던 생각 중에는, 피해받은 일로 여겼던 일 하나와 다행이라 여긴 또 다른 한 가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후자 역시도 다 마찬가지로 피해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처음 선장으로 승선할 즈음에는 같은 연배의 젊은이들 중에서는 가장 나은 급료로 대우받았었다는 만족감이 좋았지만 그도 잠깐, 몇 년 지나는 사이에 우리의 봉급은 제자리걸음 내지는 깎이는 형편으로 묶였던 일이다.
육상의 노동자들까지도 우리의 봉급을 추월하는 현상이 생겨났다는 서글픈 생각이 전자의 생각을 대표한 일이고, 후자의 판단은 정년 연한이 교육자들까지 깎이던 지난 IMF 상황하에서도 우리들의 정년은 꿋꿋하게 그대로 있어 주어, 그 걸로나마 위안 삼고 있었던 점이다.
(우리나라 IMF의 위기는 해운산업이 구해준 것이란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다.)
오늘 수령한 공문에 의해 그동안 다행이라 생각했던 일의 마지막 보루인 62세 정년마저 빼앗긴 셈이 된 것이다. 안 그래도 매력이 별로 없다고 점점 기피하는 풍조가 스며드는 3 D 업종인 선박 승선 생활인데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앞으로 계속해서 선원 하겠다고 나설 젊은 마도로스가 과연 얼마나 될까?
떠나야 할 이 세계를 애틋하게 생각해서 무엇하랴!-이겠지만, 그래도 내 평생을 바친 이 바닥이 물론 나 혼자만의 기우 일진 몰라도, 별로 잘 굴러가지 못할 것 같다는 짐작을 한다는 자체가 우리나라의 해운에 결코 우려 만일 수는 없지 않을까?
평소와는 다르게 늦어진 시간인데도 잠이 오지 않아 통신실에 가서 열두 시가 넘은 후 회사로부터 온 공문이 있나 E-MAIL을 다시 살피기로 한다. 혹시라도 오전에 왔던 정년에 관한 이야기가 잘못된 일이었다고 정정 공문이라도 왔으면 바라는, 되지도 않은 치기 어린 내 생각이 앞장서 나선 때문은 아닌지.
가능한 일이라야, 기대해보는 거지... 내 원참! 아무런 공문도 와 있지 않은 빈 이메일 함이 딱하다는 듯이 열어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