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항에 도착하면서
처음 포항을 출항할 때부터 예상했던 ETA를 맞추지 못하고 스물두 시간이나 늦어진 상황으로 도착했다.
어제 한 밤중에 도착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하느니 더 늦춰서 이 아침에 들어오는 게 여러모로 보아 나은 일이라 판단하며 네 시로 점찍고 들어온 것이다.
밤중에 브리지를 떠나 자러 내려오기 전에, 해도 상에 그 위치에 도착하면 알리라고 적어 놓은 위치에 도착했다는 당직사관의 연락을 두 시에 받았다. 예상한 대로 레이더 화면상에는 하얗게 깔린 점들로 변한 배들의 모습이 가득 담겨 있다.
그 가운데로 우리 배가 들어가야 할 곳을 찾아 천천히 접근하다 보니, 항계에 도착하고도 한 시간 20분이 지나서야 겨우 닻을 놓을 수가 있었다.
-8 SHACKLES IN WATER HOLD ON Sir
선수루에서 일항사가 투묘에 대한 내 지시사항을 실행한 후, 마지막 복창을 해온다.
그 길이만큼 사용하라고 지시한 앵카 체인의 길이 8개 샤클 까지를 수면 상 높이에 이르도록 내어주고 더 이상 나가지 않게 꼭 잡았다는 보고이다.
이어서 해저에 닻이 잘 박힌 것까지 마지막으로 확신한 후 주기관도 더 이상 사용치 않는다고 휴식을 취하게 명령하고 나니 이제야 첫 선적지에 무사하게 도착했음을 기뻐할 시간이 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인사가 모두 나를 향해 오는데,
-진짜 수고들 많이 했어요.
나도 답례를 하며 산뜻하니 완수해 치운 항해를 기뻐하는 편안한 심정으로 무사 도착을 알리는 전보를 대리점에 넣어 준다.
그 전보에 의해 대리점은 본선이 화물 실을 준비가 다 된 상태로 도착했음을 화주들에게 알려 준다.
화주는 자신들의 화물을 싣기 위해 본선을 빌린 것에 대한 제반 경비 지급의 시작 시간을 계약에 따라 투묘했다는 그 시간을 기점으로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한 번 더 브리지를 휘 둘러보고 난 후,
-자! 모두들 수고하세요.
하며 브리지를 벗어나려는 데 문득 다리가 무지근하니 힘든 감각이 갑자기 느껴진다.
새벽 두 시부터 네 시 반까지 조금씩 움직거리며(만보기에 의하면 1,400여 발걸음을 딛었지만) 꼬박 서있었던 후유증이 긴장을 푸는 마음 따라 생겨난 것이다.
처음 선장 직무를 시작하였던 70년대 초반 시절에는 출입항을 하면서 이 정도의 브리지 근무는 몸의 컨디션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도 잘 해 내였었는데 요사이는 조금만 시간이 길어졌다 하면 몸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무리라고 항의하는 양 느끼게끔 변한 사실에 어쩔 수 없는 씁쓸한 마음이 들곤 한다.
지금도 혼자 방으로 내려오면서 피곤을 느끼는 몸을 의식하니 슬그머니 약 오르는 기분이 들어 에잇! 그렇다면 하고 새삼 갑판을 돌아보는 운동을 과감히 하기로 하고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자려던 침대를 떠나 갑판으로 내려갔다.
갑판은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어 사실 운동하기에는 안성맞춤이지만 얼굴에 와 닿는 바람기가 녹녹하지 않다.
배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맞게 되는 바람이니 진짜로 그 속도의 상대적인 바람이 불어준다는 뜻인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새로운 걱정거리가 다가선다.
혹시 바람이 더욱 거세 져서 닻이 끌리는 불상사라도 발생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슬그머니 들어선 것이다. 엊저녁 이곳 부근의 기상도로 봐서는 더 세어질 바람이 아니었고 또 현재 이 정도의 바람에는 닻이 끌리는 일은 절대 안 생겨하는 믿음을 가지면서도 말이다.
배는 나의 그런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전연 알아주지 않을 모양인지 잔주름 마냥 밀려드는 파도에 한 번씩 흔드는 선체 횡요를 따라 자신의 몸속에 담고 있는 발라스트 물을 흔들어주어 쏴아-하는 김 빠지는 소리를 탱크의 에어 벤티레이터(통풍관)로 하여금 뱉어내게 만들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옆을 열심히 지나치고 있는 내 심정에 또 한 번 철렁하니 파문을 보태게 해준다. 그런 갈등의 반복 속에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 시작한 것이 벌써 선, 수미의 전 갑판을 대여섯 바퀴 넘어 돌게 되었고 머리에서는 땀이 촉촉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날이 샐 것 같지 않게 어두웠던 사방도 그 새 희뿌여니 밝아오는 여명은 어쩔 수 없는지 갑판의 투광등(FLOOD LIGHT) 불빛이 아니더라도 사물을 충분히 구별할 수 있게 되어온다.
쓸데없이 맴돌던 걱정들도 그에 따라 사라지는 걸 보니 어둠이 그런 조바심을 더욱 조장한지도 모르겠네... 아니 그랬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