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브리지로 올라갔다. 태풍 피항 체제에서 다시 원래의 항로로 복귀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가지고 원 침로로 들어설 수 있는 최단 코스를 입력하여 세팅시켰다.
아침 식사하며 내다본 하늘이 맑고 푸르게 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햇빛이 구름 사이로 스며 나오는 밝은 빛이 어제의 음울한 태풍 내습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했던 마음을 걷어주고 있다. 아울러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너울의 흔들림에 동조하는 선체의 흔들거림도 그렇게 겁나지 않게 해주고 있다.
힘든 세월을 살았지만 그래도 올곧게 뻗어 낸 나무의 연륜을 닮은 나이테 같은 모습의 기상도에 그려진 태풍의 눈이 있는 중앙부의 모습을 본다. 우리 배가 태풍 진행 방향의 좌 반원(가항 반원)에 들어서서 계속 태풍과 멀어지기 시작했음을 실감한다.
내일 아침이면 대만의 중앙부를 관통하던가 아니면 조금 미적거리며 비바람으로 분탕질을 치다가 떠날 태풍이 예상되는 기상도를 본다. 무사히 그 앞쪽을 빠져나온 내 기쁨에 젖어들다 보니 잠시 대만 사람들이 당할 고통은 그만 잊어버리고 있다.
이번 항차 호주에서 싣고 나올 철광석을 바로 그 대만의 가오슝 항에 풀어줄 예정이다. 대학 3학년 때 해양대학 실습선 반도호로 처음 원양 실습차 방문했던 곳이 바로 그곳 가오슝 항인데 그때만 해도 대만과 우리나라가 사이좋은 이웃이었던 때라 시정부 차원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실습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어쨌거나 다음에 가오슝에 정식으로 입항할 때는 태풍이 생겨있지 않아야 하는 건데 하는 걱정을 하다가, 이번 같이 태풍을 잘 피해 왔듯이 그때도 잘 될 건데 왜 미리 걱정하고 그러나 하는 생각을 떠 올리며 안심하기로 한다.
지금쯤 명동성당에서 아이들과 같이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있을 아내를 생각한다. 그리고 미사가 끝난 후 인사동에 가서 작은아버님 생신 연에 참석할 거라던 편지를 기억해 낸다.
브리지에 올라갔다. 마침 저 앞쪽 배의 선수 2번 창 해치 폰툰(HATCH PONTOON) 위에 앉아있던 왜가리 비슷하게 생긴 회색 빛 도는 세 마리의 새가 무엇엔가 놀라서 공중으로 높이 떠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태풍으로 인해 일하지 못하고 있던 발라스트 해수의 교환을 재개하려고 일항사가 선수 쪽으로 나가는 게 보였는데 그의 출현에 지레 놀라서 떠 오른 모양이다.
피곤한 날개를 쉬며 휴식을 취하려고 잠깐 머물렀던 새들 같은데, 어쩌면 태풍을 피해 나왔다가 우리 배에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계속 날갯짓을 하며 높이 떠오르는 모습이 많이 피곤해서 힘들어 보이는 느낌을 부추기는 것은 내가 지레짐작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마침 그 들의 옆을 유영하듯 매끄럽게 활공하며 지나치는 갈매기의 모습과 비교해보니 확실히 내 짐작이 맞을 거라는 짐작을 떨칠 수가 없다.
그들은 갈매기와 같은 바다 위에서 물속의 고기들을 잡아먹으며 사는 바닷물과 친한 새가 아니기에 저렇게 우왕좌왕하며 날아오르다 보면 어느새 기력이 소진하여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주검을 갑판에서 만나면 혹시 조류독감이라도 걸렸던 새가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도 되면서 새의 사체를 치우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이다.
멀어져 가는 그 새들의 모습을 향해 무사히 잘 날아가서 아직까지 그들에게 남겨져 있을 주어진 생을 좀 더 살다가 하늘나라로 가라는 기원을 실어 보내며 배웅해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잠시 후 다시 날아올 것으로 여겨지므로 내일 필리핀에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계속 우리 배에서 살아있다가 육지가 가까워졌을 때 날아가라고 기원을 바꿔준다.
급하게 날아 올라 바다 위로 가지만 이 넓은 바다 위 그 몸을 쉴 곳은 당장 우리 배의 소금기로 끈적한 갑판밖에 없다.
저런 새들을 보며 제일 먼저 느끼는 마음은 그들이 마실 수 있는 고인 빗물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갈증을 걱정하는 것이지만 어지간한 고인 빗물이 아니라면 갑판의 고인물은 거의 해수가 햇볕에 하얗게 조려진 소금기를 품고 있는 짠물인 것이다.
저녁 식사를 끝낸 후 다시 브리지에 올라갔다. 점점 어두워 오는 사방을 둘러보는 마음이 많이 평화로워져 있다. 태풍 장미와는 이제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상황에 들어서서 안심하고 항해하는 때문이다. 그런 우리 배의 침로 앞을 오른쪽에서 가로질러 왼쪽으로 빠지려는 배의 모습이 레이더 화면에 뜬다.
AIS 정보로 보니 카캐리어이다. 아마도 일본을 향하는 배인 듯싶은데 지금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는 태풍 장미가 지키고 있는 해역을 지나서 가야 하는 배로 추측된다.
그 배가 우리를 부른다. 우리 배는 그 배가 안전하게 우리 선수를 지나쳐서 가도록 우리 배의 선수를 오른쪽으로 돌려주어 협조 동작을 해주고 있는데, 그가 물어 온 말은 그런 항법 관계를 안전하게 실행하기 위해 확인하려는 의도가 아닌, 우리가 지나온 곳의 기상 상황을 묻고 있다.
태풍의 존재가 너무나 커서 불안한 마음에 어떤 위로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바람으로 그런 물음을 하는 걸로 단박에 짐작이 간다.
응답하고 나간 일항사는 그냥 일반적인 대답을 하는 걸로 이야기를 이어주고 그들이 물어 온 대만 해협을 통과해서 내려온 이야기를 해준 후 대화는 끊겼다.
이젠 완전히 깜깜해진 바다 위에서 선미등 불빛만을 남겨주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그 배를 향해 <안전 항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진정한 마음의 기원을 보내었다.
아마도 그 배는 필리핀 루존도 꼭대기 전에서 태풍 피항을 위해 좀 쉬었다가 가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장미는 오늘 오후, 중심 기압이 915 hpa의 초대형 태풍으로 아직 쇠퇴기에 들지 않은 상태로 남아서 거의 북진을 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