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던 이 땅에서 현대가 일구고자 했던 독자모델의 꿈
1970년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자동차라고는 기아가 일본에서 들여온 브리사, GMK의 시보레 1700이 전부였다. 당시, 기아의 브리사는 "이 모델"이 출시되기 직전인 1975년, 판매량 58.4%를 기록하였는데, 앞서 언급한 "이 모델"의 출시로 박 터지게 경쟁하였다.
이 모델은, 1974년에 토리노 모터쇼에서 최초로 공개되어 1975년 12월에 첫 생산에 돌입, 이듬해 1월에 최초로 판매를 시작한 모델이며, 출시 당시부터 우리나라 첫 고유모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날개 돋친 듯 판매되었던 모델이다.
오늘 다뤄볼 모델은, 현대 최초의 고유모델이자 1976년 1월부터 1990년 1월 단종 때까지 총 66만 1,501대라는 어마무시한 판매량을 기록한 현대자동차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전설의 자동차,
현대자동차는 당시 포드와 기술제휴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래서 당시 포드의 그라나다와 20M을 라이선스 생산 한 바 있다. 물론 이 두 모델도 당시 레코드 시리즈와 잘 경쟁하며 대형차로 잘 팔렸다.
하지만, 현대는 계속해서 독자모델을 만들고 싶어 했고, 일본에서 들여온 소형차인 기아산업의 브리사가 꽤나 잘 팔리는 것을 목격하자, 브리사와 같은 소형차량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현대는 왜 그렇게 독자모델에 집착했을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현대는 그 당시 포드에게 기술제휴로 내는 금액이 상당했으며, 이를 줄이기 위해 우리도 독자모델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 당시만 해도 독자모델을 만드는 자동차회사가 아시아에서는 많이 없었을 시절, 현대는 이 가시밭길을 굳건히 걸어 나가려고 하였다.
이렇듯, 현대의 의지는 확고했기 때문에 현대는 1973년에 포니의 개발을 착수한다. 당시 이탈리아의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포니의 전체적인 설계와 디자인을 맡겼으며, 주지아로는 세단형태의 자동차보다는 유럽에 맞는 해치백 형태의 차량을 추천하여 해치백 형태로 개발되었다.
포니의 플랫폼 자체는 미쓰비시 랜서 1세대의 후륜구동 플랫폼을 라이선스로 들여와 생산하였고, 엔진은 마찬가지로 미쓰비시의 새턴엔진을 장착하였다.
여담이지만 포니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상당히 특히 한데, 현대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하동 정 씨 가문이 경영하는 회사인데, 하동 정 씨는 한자를 당나귀 정(鄭)을 사용하기 때문에 당나귀, 조랑말이라는 뜻의 포니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현대자동차가 포니에게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
포니는 1976년 1월에 처음 출시되자마자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는데, 그 해에만 1만 726대가 판매되어 단숨에 40% 라는 점유율을 기록하여 브리사를 따돌렸고,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포니는 출고가가 228만 9,200원에 계약금이 50만 원으로 당시 물가로는 엄청난 금액이었지만(현재 물가로 환산 시 2,256만 9,300원가량) 1만 대가 넘게 판매되며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했다.
기아산업의 브리사는 출시가 되자마자 택시로 많은 인기가 많았는데, 포니도 그 역할을 하였다.
영업용 모델의 판매량 역시 무시할 수 없었기에 판매량은 브리사와 쌍벽을 이루었는데, 당시 포니는 영업용으로 브리사보다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다. 물론 브리사의 판매량도 엄청났기에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당시 판매량에서 조금이나마 우위를 점유했던 이유는 영업용 모델의 LPG 모델이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정식모델은 아니었고, 알음알음 LPG로 개조를 하는 차량들이 많아졌다. LPG 가격은 당시 판매되던 자동차용 휘발유 보다 엄청나게 싼 편이었기에, LPG 모델이 존재하지 않던 브리사에 비해 영업용에서 많은 판매량을 기록할 수 있었고, 이는 곧 전체 판매량의 증가로 다가왔다.
이후 브리사는 1977년에 정식으로 LPG 모델이 출시되었다.
물론 영업용으로만 판매되었던 만큼 현재는 자취를 거의 감췄기 때문에 볼 수 없지만, 영업용 LPG 모델의 존재는 그 당시 엄청난 이점으로 다가왔다.
현재 해남에 말소처리 된 LPG 모델이 1대 존재하며, 이 외의 잔존개체는 알 수 없다.
현대자동차는 포니를 5 도어 해치백만 내놓지 않고, 적재공간이 존재하는 픽업형 모델 역시 출시하였는데, 브리사 픽업에 비하면 많은 판매량을 자랑하여, 현재 남아있는 잔존개체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모델이다.
픽-업 모델은 포니 외에도 브리사 역시 출시되었었는데, 브리사 픽업은 용달 화물로 대부분 판매되었던 반면, 포니 픽-업의 경우는 일반 자가용으로 많이 판매되었기 때문에 잔존개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인해 판매 기간에서의 차이도 컸다.
이 외에도 1980년에는 3 도어 모델을 출시하여 일반적인 5 도어 모델 외에도 다른 모델들을 추가해 선택의 폭을 넓히려 하였으며, 왜건형 모델을 출시하여 적재를 많이 해야 하는 고객들의 선택을 픽-업과 웨-곤 두 개로 분산시켰다.
1982년에는 포니 2라는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출시하였는데, 당시 페이스리프트라는 개념이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박혀있지 않았던 터라, 사람들에게는 2번째 모델로 인식되었고, 신차 효과를 엄청나게 볼 수 있었다.
당시 포니 2의 코드네임은 페이스리프트 이전 모델과 마찬가지로 110이었으며, 이는 동일한 차량으로 인식되었다는 의미를 가졌다.
캐나다 수출형 모델인 포니 2 CX 도 국내에 출시하였는데, 당시 5마일 범퍼를 탑재하여 회복력이 있는 범퍼를 탑재하였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의외로 포니는 미국에 수출되지는 못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의 엄격했던 배출가스 규제가 컸다.
당시 포니에 탑재되었던 미쓰비시의 새턴엔진은 미국의 배출가스 규제를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포니는 미국으로 수출될 수 없었다.
이후 포니라는 이름이 미국에서 달리기 시작한 것은 포니의 후속모델인 포니 엑셀이 미국에서 포니라는 이름으로 팔리기 시작한 이후이다.
포니 2 모델 역시 영업용 모델이 존재하였으며,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했다.
당시 포니 2의 영업용 모델은 82년도에 포니 2가 출시된 이후로 1990년 1월까지 약 8년이라는 기간 동안 생산되었는데, 당시 일반 승용모델은 1988년에 단종이 된 뒤였다.
1985년에 포니엑셀이라는 후발 모델이 출시되었으나, 인기는 시들지 않아 현대자동차는 포니와 포니엑셀을 병행생산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쓰비시 새턴 엔진의 연비가 오리온 엔진에 비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일반 승용 모델은 단산되었고, 88년부터 영업용 모델과 픽업 모델만 생산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 1월, 최종적으로 영업용 모델과 픽업 모델이 단종되며, 포니의 판매는 막을 내리게 된다.
현대자동차는 전혀 다른 디자인으로 포니의 쿠페 모델인 포니 쿠페를 출시하려고 하였다.
당시 2인승으로 콘셉트카까지 제작되어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하였으나, 70년대 중반에 닥친 오일쇼크의 여파로 1980년대에 와서도 출시가 지연되다가 최종적으로 1980년 8월 출시가 전면 백지화 되었다.
당시 출시를 위해 부품들의 금형 및 시제차까지 만들어진 상태였으나, 출시가 무산되며 모든 자료들이 사라졌다.
이후 2023년, 포니 쿠페가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손에서 다시 공개되며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포니의 후속모델은 라인업 상으로는 포니엑셀과 프레스토이다. 이후 엑셀로 통합되었으며, 엑셀의 단종 후 엑센트와 베르나가 실질적으로 후속모델이 된다.
이후 엑센트로 다시 소형차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2019년에 최종적으로 단종되며 국내에서는 포니의 후속 라인업인 현대의 소형차의 라인업은 SUV인 베뉴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엑센트가 단종되고 포니의 명맥이 끊긴 줄 로만 알았던 2019년, 포니의 디자인 철학을 녹여낸 현대의 45 EV라는 콘셉트카가 공개되며 포니의 부활을 알렸고, 그 결과 2021년에 아이오닉 5라는 전기차의 이름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이렇듯 포니는 우리의 곁에서 오랜 기간 동안 달려왔고, 이제는 그 디자인 철학을 담은 아이오닉 5가 우리의 곁에서 달리고 있다.
비록, 포니와 생김새는 크게 닮지는 않고 SUV의 느낌이 강해진 아이오닉 5이지만, 포니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아이오닉 5가 더욱 오랫동안 판매되어 우리의 곁을 오래, 함께 달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