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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오트리 Jan 16. 2024

밀레니엄은 신대륙에서



90년대 말의 일이다.


밀레니엄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던 서기 2000년을 지나 20 하고도 4년째를 맞았다.

1990년이란 단어는 이제, 그야말로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아니..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80년대를 사는 어떤 사람이 30년 전인 1950년대를 떠올려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나는 졸업 후 기업,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디자인 회사에 취직을 하여 2년 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하고 미국으로 떠나려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사귀었던 화실 친구와 8년 연애를 하였는데 그는 먼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있었던 상황. 3년 간의 롱 디스턴스 연애를 지속하던 중 더 이상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아서 양가의 허락을 받고 아직 학생이었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는 가족과 친구들, 내가 아껴 마지않던 많은 것들을 뒤로하고 이민가방 4개와 여행용 캐리어에 추리고 추린 짐들을 눌러 담아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추렸다고 하니 뭔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골라낸 것 같지만 아직도 왜 무거운 프라이팬들과 그릇 등 현지에서 구해도 충분한 것들을 꾸역꾸역 싸가지고 갔는지 모르겠다.



떠나던 , 친한 친구들이 당시 유일한 국제공항이었던 김포공항에 배웅 나와줘서 같이 아쉬움에 시간을 보내다가 출국장 입구에서 눈물로 헤어졌던 기억이 난다. 지금처럼 온세계가 촘촘한 망으로 연결되어 시공을 초월하는 신기로운 세상이 아니었던  시절, 유일한 실시간 연락통이던 국제전화는 요금이 비싸도 너무 비싸서 시계 분침이 움직이는 것을 세어가며 큰맘 먹고서야 걸던 때였다. 떠나면 연락이 쉽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결혼과 함께 외국으로 떠나는 나를 그들은 아마 기약 없는 심정으로 보냈을  같다.



결혼하기 6개월 전, 답사를 왔을 때랑은 사뭇 다른 마음가짐으로 LAX(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내렸다.

여행지의 공항이라면 가능한 재빨리 빠져나와 신나게 관광을 하고 일정을 마친 후 다시 비행을 해야 할 때 찾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내가 새롭게 정착해 살게 된 도시의 공항이며 무슨 이유에서든 이곳을 찾을 일이 가까운 시일 안에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나와 일종의 "관계"가 생기는 것이다. 한번 스쳐 지나갈 무엇이 아니라 시간과 경험이, 이야기가 쌓일 무엇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여행자의 마음이었다면 이때는 함께 살 사람의 마음으로 주변을 눈에 담았던 것 같다.



밀레니엄.

새 천 년을 맞을 날이 1년도 채 안 남은 시점이었다.

생각해 보면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이 얼마나 완벽한 세팅인가 싶지만 내 속에는 호기로운 모험가의 마인드와 벌써부터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불편함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한겨울 옷을 입고 떨어진 신대륙은 한국 늦가을 날씨에 웨스턴 무비의 건조한 사막 공기를 풀어놓은 듯 난생처음 겪는 구색의 계절이 채워져 있었다. 해변에서 막 뛰어온 듯 보이는 튜브 탑에 반바지, 플립플랍 차림의 사람들부터 재킷에 스웨터, 가죽부츠를 걸쳐 입은 사람들 까지. 사계절 전천후 옷장의 퍼레이드가 높이 솟은 팜 트리들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그 속으로 나도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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