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첫 동네였던 글렌데일에는 Brand Blvd.라는 메인 도로가 있다. 베이커리와 가구, 소품 가게들이 소소하게 앉아있는 그 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하루는 걷다가 눈에 띄는 어떤 할머니를 만났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온통 금색 옷과 신발, 장신구로 깔맞춤을 한 할머니였다. 몸은 깡 마르고 어릴 때 즐겨하던 헤어스타일을 고수한 듯, 숱이 적고 얇은 금발을 바짝 당겨 묶은 포니테일에 금색 미니 스커트와 금색 스니커즈 차림의 할머니.
적지 않게 당황해서 너무 빤히 쳐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나랑 눈이 마주치자 할머니는 캘리포니아 햇살만큼이나 화창하게 미소를 지으며 “hello, there” 하고 인사를 건넸다. 머쓱해진 나는 어정쩡하게 맞인사를 했지만 누군가 그 순간 나를 봤다면 마치 황금빛에 빨려들 듯 얼빠진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또 한 번은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다 나오면서 한 할머니를 만났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대기 시간이 길었던 터라 진료를 받고 지친 상태로 병원을 빠져나와 옥외에 세워둔 차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맞은편에 파킹된 차에 타려던 낯선 노인이 말을 걸어온 것이다.
“저기요! 멀리서 걸어오는데 빛이 나네요. 젊다는 것은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부드럽게 웃고 있는 평범한 할머니였지만 활기찬 톤으로 처음 본 누군가에게 주저 없이, 그러나 요란하지 않게 찬사를 보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떨결에 ‘고마워요. 당신도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웃으며 답하고 떠났지만 드라이브 내내 왠지 기분이 좋았다. 차에 붙은 거울을 내려서 내 얼굴에 정말 빛이 나는지도 살폈다. 장담하건대 그 할머니는 길에서 사슴을 만나도 멈춰 서서 예찬했을 것이다.
이십 대 끝자락을 막 지나온 그때는 나이 듦에 대해, 노년을 사는 시니어들의 삶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 같다.
노년기 여성을 바라볼 때 동등한 여성으로 인식하고 나에게도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쉽게 연상되는 나이 든 여성으로 나의 외할머니를 떠올린 후 뭉뚱그려진 카테고리에 ‘할머니’라 이름 붙이고 분류해 넣은 다음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저 두 노인의 온화함, 당당함, 자유함이 남긴 기분 좋은 인상이 여전히 생생한 것을 보면 우연히 지나친 그들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면 좋을는지 어렴풋이나마 밑그림을 갖게 된 것 같다. 그것은 삶의 성취로 판단되는 무엇이 아니라 삶 자체에 배어있는 인생을 대하는 태도, 존재 자체에 담긴 무엇임이 분명하다.
피부에도, 머리카락에도 나이 든 흔적이 역력하고 동작이 느려지고 귀가 좀 안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남의 시선이나 사회가 갖는 편견에 개의치 않고 자기의 스타일과 삶을 즐길 수 있다면 참 멋질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젊다고 그런 것에 더 자유할 이유나 나이가 들었다고 특별히 더 위축될 까닭이 어디 있을까. SNS에서 가끔 힙한 할머니들의 패션을 보게 되는데 뭔가 더 기발하고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나이 든 사람은 이러이러할 것이라고 근거 없이 갖는 일반적 시선, 보편적 편견을 깨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뭘 원하는지 알고 자기의 취향과 즐거움을 먼저 소중하게 생각하고 인정한다면 타인의 시선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의 선택과 취향도 존중하게 되지 않을까.
또 타인을 향한 친절과 미소와 여유는 연륜에서 나오는 내면의 힘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더 젊게 보일까 신경 쓰며 지나간 날을 한탄하고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 듦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젊음에게 ‘지금이 그렇게 아름다운 때이니 맘껏 즐거워하라’고 말해줄 수 있는 여유, 인생의 어느 때를 지나든 삶 자체로 소중하고 기뻐할 이유가 충분하기에 ‘살아있는 것’에 찬사를 보냄으로써 기쁨을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오래 산 자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나도 그렇게 나이가 들고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