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가 아닌 마지막 속눈썹

한달간 한국살이

by Caraish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올 한 해. 사실 한국에 가기로 했던 건 3월이었다.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라 눈물을 머금고 티켓을 취소해야만 했고 일과 육아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던 여름 즈음, 우리는 다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10월이면 가을이라 단풍이 예쁘게 들겠다는 기대와 그때면 조금 더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여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우리는 기뻤고 동시에 조마조마했다.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2주간의 격리를 잘 견딜 수 있을까. 혹시라도 공항이나 비행기에서 코로나 무증상 환자와 마주치면 어쩌지. 그래도 떠나고 싶었다. 어디든 좋으니 지금 이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가족이 기다리는 한국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휴식처로 다가왔다.


사실 우리는 많이 지쳐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둘 다 3월부터 재택근무를 하며 미취학 아동 두 명을 집에서 케어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데이케어는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고 새로운 곳에 대기를 걸어놓은 상태였지만 남편은 막상 아이들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미국 내 계속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우리의 일상이 일그러진지도 반년이 훌쩍 지났고 습관처럼 내뱉던 '힘들다'라는 말도 이제는 식상해져 갔다. 쉼이 절실했고 무엇보다 비빌 언덕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친정이든 시댁이든 동생이든 시누이든 가족과 가까이 사는 친구 엄마들이 누구보다 부러웠다.


여행 며칠 전 막바지 준비를 하면서 나만의 휴가 전 의식을 거행했다. 마스크를 쓰고 네일 샵에 가서 손발톱을 하고 속눈썹 연장을 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놀러 가는 기분이 한껏 증폭되었으니 단순한 목표였던 기분전환은 이룬 셈이었다. 속눈썹 연장을 처음 받은 건 아니었다. 전에도 몇 번 한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워낙 오랜만에 하는지라 시술하는 분이 설명해 주시는 애프터 케어를 꼼꼼히 챙겨 들었다. 잘 케어해주면 2-3주 정도는 지속할 수 있지만 한 달 정도 후에는 서서히 떨어질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 처음 2주간 우리 가족이 지내게 될 격리지를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실 우리 네 식구 모두 서류상으로는 한국계 미국인이라 시설에서 격리를 해야 하는 게 맞지만 한국에 직계 가족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미리 서류 준비만 끝내면 자가 격리로 전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친정 부모님이 계신 시골 마을에 게스트하우스에 있기로 했다. 부모님 집과도 멀지 않았고 마당이 곁들어 있는 주택이라 아이들이 많이 답답해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무래도 시어머니가 계신 서울 빌딩 숲 사이 아파트보다는 나아 보였다. 격리생활은 물론 예상했던 대로 답답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다. 격리하는 동안 처음 일주일은 재택근무를 계속 진행했고 아이들도 다행히 무리 없이 잘 따라와 주었다. 일단 삼시 세 끼를 엄마가 꼬박꼬박 챙겨주시니 다음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들과 재택근무하는 워킹맘에게 이게 얼마나 큰 짐을 덜어주는 것인지. 엄마가 하루에도 몇 번씩 현관문 앞에 음식을 가져다주시고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부모님 지인분들도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주셨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를 창문 너머로 보시며 왜 이리 많이 컸냐고들 하셨다. 큰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데 그분들의 기억 속에는 내가 아직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 중학생으로 각인되어있나 보다.


그렇게 듬뿍 사랑과 관심을 받고 정식으로 3주 휴가에 돌입하며 나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쉼 다운 쉼을 누렸다. 격리가 해제되고 친정에 며칠을 묵으면서 나는 가족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소소한 행복들을 한시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이들을 잠깐 엄마와 언니에게 맡기고 혼자 뒹굴뒹굴할 수 있는 것, 엄마가 해준 반찬과 간식들을 아무 때나 원하는 만큼 편히 먹을 수 있는 것, 2년 만에 본 조카들과 아이들이 티격태격하며 같이 노는 걸 지켜보는 것, 아빠가 구워주는 고기를 실컷 먹고 아이들을 재운 후 엄마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수다 떠는 것. 아 엄마라는 존재가 이런 거였지 하고 새삼 느끼는 시간이었다. 엄마라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편안함과 따뜻함이 더 이상 막연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같이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그 며칠 동안은 내 삶이 꽉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친정을 떠나 시댁으로 향하는 날 내 마음은 물에 적신 스펀지처럼 무거웠다.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이민생활로 작별인사에 이제는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언제 우리가 또 이렇게 옹기종기 한 지붕 아래 모여 떡을 떼며 나눌 수 있을까. 우리와 친정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 등교로 우리보다 이틀 먼저 서울에 올라간 언니는 돌아갈 때 엄마에게 반찬이며 살림살이를 한가득 받았다. 이번에 새로 한 김치부터 조카가 유난히 좋아했던 이불까지 모두 차 트렁크에 꾹꾹 실어 넣었다.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멀긴 하지만 마음먹으면 언제나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엄마가 있다는 것, 손주들이 자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명절마다 생일마다 함께 축하해줄 수 있는 것 모두 나에게는 없고 언니에게는 주어진 특권처럼 느껴졌다. 물론 안다. 언니도 나름대로의 십자가를 지고 살고 있다는 것, 또 지금 내가 사는 삶이 어떤 이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쯤은 안다. 코로나는 대체 언제쯤 끝날 기미를 보일까. 가족과 굳이 멀리 떨어져 해외 생활을 하면서 내가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그만큼 의미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별의별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내 모습은 마치 '마지막 잎새'에서 담쟁이덩굴을 바라보며 절망에 빠진 존시와도 같았다. 폐렴에 걸린 화가 지망생 존시는 창밖에 담쟁이를 보고 잎이 다 떨어지면 자신도 죽게 될 거라고 본인의 처지를 비관한다. 이 얘기를 들은 베어먼 영감은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벽에 담쟁이 잎 벽화를 그린다. 그리고 존시는 좀처럼 떨어질 생각이 없는 베어먼 영감이 그린 잎을 보며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되찾아간다.


나에게는 담쟁이 잎 대신 하나 둘 떨어져 가는 속눈썹이 마치 한국에서 남은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시술 후 2-3주 후에 서서히 빠지기 시작하면서 한 달 정도 지나면 대부분 없어질 거라던 말이 꼭 맞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눈을 깜빡거리면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로 풍성했는데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군데군데 듬성듬성 빠진 속눈썹 자리가 눈에 띄게 보였다. 이 속눈썹들이 다 떨어지고 미국에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면 내 마음을 꽉 채웠던 엄마의 존재도 주먹 쥔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알갱이들처럼 스르르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 시어머니 댁에서 남은 일주일 반을 보냈다. 워낙 애주가이신 어머니와 지인분들과 시끌벅적한 술자리도 갖고 한국에 나와있는 친구들, 대학 동기들,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느라 하루하루 24시간을 30시간처럼 꽉 채워서 보냈다. 매일 밤 집에 돌아와 세안을 하면서 난 속눈썹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평소 피곤하면 눈을 비비는 습관이 있던 나는 그마저도 조심했다. 왠지 그냥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한 달간 한국살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다시 미국에 들어온 지 이제 거의 일주일이 지나간다. 사실 시차 적응으로 하루 중 절반 이상은 여전히 몽롱한 상태이다. 돌아오자마자 하루라도 온전히 쉴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일과 육아는 야속하게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일상에 복귀하면서 한국에서 누렸던 사치, 가족들의 도움의 빈자리가 더 크게 다가온다. 거울을 보니 속눈썹 두어 개가 아직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도 이 아이들은 시술하시는 분이 풀칠을 꼼꼼하게 잘해주신 거 같다. 어딘가 모르게 대견하다.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빨래를 해 왔던 잠옷을 입으니 왠지 한국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습한 어머니 댁 공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고 우리가 사용했던 섬유유연제 향기 같기도 하다. 아무튼 정겹다. 이제 두어개 남은 속눈썹마저 다 떨어지고 이 옷도 빨래통에 들어갈 때쯤 되면 시차도 차차 적응되고 여독도 풀리며 언제 한국에 다녀왔었냐는 듯이 이 곳 일상에 다시 물들어있겠지. 다시 힘을 내본다. 내게는 비바람 맞으며 벽화를 그렸던 베어먼 영감은 없지만 그에 버금가는 나의 동반자, 토끼 같은 두 딸, 항상 날 응원해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