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 모이 찾기

돌봄의 시작

by Caraish

올해 만으로 다섯 살인 둘째는 유난히 동물을 좋아한다. 그 또래에 많은 여자 아이들이 그렇듯 귀여운 아기 고양이, 아기 강아지, 아기 토끼를 수도 없이 그리고 색칠하고 엄마인 나에게, 선생님에게, 친구들에게 카드로 만들어 나눠주는 게 취미이다. 예전에는 남편의 작업실에 있는 프린터에서 종이를 슬금슬금 한두 장씩 가져오더니 이제는 대놓고 당당히 한뭉큼씩 가져와서 쓰기 일쑤다. 한 장씩 가져오라고도 하고 스케치북도 사줘 봤지만 큰 손 그녀를 막을 수 없다. 덕분에 집 안 곳곳에는 귀여운 동물 그림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아이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주기적으로 버려야 하는 것도 나의 일이 되었다. 우리 윗집에도 아주 귀여운 강아지가 한 마리 산다. 크림색과 캐러멜 색의 복슬복슬한 털이 섞인 '캡틴' (강아지 이름)을 볼 때마다 아이들 입에서 우리도 강아지 키우면 안 되냐는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사실 우리 부부도 첫째가 태어나기 전에 강아지를 키웠었다.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자라면서 애완견을 키워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나에게 어찌 보면 아이들이 생기기 전 우리의 첫 '아기'였던 셈이다. 두 손을 모으면 온몸이 폭 안길 만큼 작았던 두 달 때 처음 데려온 녀석을 5년간 정을 주고 키우다가 첫째가 생기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친구네 가족에 입양을 보내야 했지만 처음으로 나에게 어떤 생명체를 시간에 맞춰 먹이고 씻기며 돌본다는 것이 무언인지 알려준 아이였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며 나에게 처음 돌봄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집에서 나는 막내였고 친척들 간에도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촌은 딱 한 명밖에 없었으니 막내 축에 속했고 그 시절 그 흔한 국민 애완견 다마고치 게임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의 흐름에서 멈춘 지점은 바로 다름 아닌 병아리였다. 90년대에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라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유명한 학교 앞 병아리. 하교 종이치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면 교문 앞에 누런 박스 안에 뽀송뽀송하고 노란 병아리들을 구경하며 한눈팔던 기억이 난다. 그 귀여움은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명적이다. 시들시들하지만 보드란 털, 작아서 꼬물꼬물거리는 병아리들은 그 당시 수많은 초등학생들의 주머니와 지갑을 열게 했다. 물론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지금 내 딸들이 같은 상황에서 같은 일을 겪는다면 백 프로 (특히 둘째는) 간이며 쓸개며 팔아서 분명 병아리를 사 올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부모님은 아마 학교 앞 병아리를 사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을 거다. 하지만 유혹에 넘어간 나약한 초등학생의 나는 그렇게 우리 집에 노랗고 뽀송뽀송한 작은 생명체를 들였고 그 뒤 몇 주간 우리 집 다이내믹이 180도 바뀌었다.


애완견은커녕 병아리도 무서워하고 질색했던 엄마는 역시나 펄펄 뛰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병아리가 그 작은 다리로 집안을 누비며 총총 걸어 다닐 때면 엄마는 그 자리를 피해서 뛰어다니셨다. 주로 병아리가 올라오지 못하는 소파 위로 도망치셨고 만지지도 않으셨으니 모이를 주는 것은 상상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다시 돌려주지도 못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당시 아빠는 부엌에 들어오지 않으셨고 언니와 나는 아직 어렸으니 당연히 병아리를 돌보는 일은 우리와 한 지붕에 같이 사시던 할머니 담당이 되었다. 왠지 할머니는 잘 해내실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도시로 이사 오시기 전까지 시골에서 닭이며 다른 동물들을 키워보신 경험도 풍부하셨고 귀찮아하면서도 은근히 예뻐하시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 출근하시고 언니와 나는 학교에 있는 동안 온종일 빈 집에서 병아리와 시간을 보내신 것도 할머니 셨겠지. 그래서 그런지 병아리는 할머니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흡사 동화책에서 보던 엄마 오리 뒤에 따라 걷는 아기 오리같이.


우리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바로 병아리에게 무엇을 먹여야하나였다. 그 당시 인천 신도시 한가운데 아파트에 살던 우리는 병아리에게 무슨 먹이를 줘야 할지 막막했다. 인터넷이 발달했던 시절도 아니라 할머니의 지식을 토대로 시중에 판매되는 병아리 사료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병아리 사료를 구하는 일이었다. 그 시기와 맞물려 내 기억 속에 또렷이 자리 잡고 있는 장면은 엄마와 내가 동네 여기저기 상가, 꽃집, 애완견 가게들을 걸어 다니며 병아리 사료가 있는지 주인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엄마는 직접 병아리를 만지고 아우르며 돌보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와 함께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며 병아리 사료를 찾는 일로 관심과 표현을 대신하셨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던 그날 우리는 햇빛에 눈을 찌푸리고 손을 잡고 여러 가게들을 돌아다녔다. 아파트 숲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상가주인들에게 돌아오는 어찌 보면 당연한 대답, 사료가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허탈한 감정을 뒤로하고 우리는 꽤 오래 걸었다. 어디선가 기적처럼 예스라는 대답을 들을 희망을 쥐고서.


애석하게도 그날 결국 사료를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병든 병아리여서인지는 몰라도 결국 병아리는 불과 2-3주 만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어찌어찌해서 학교 앞 병아리를 큰 닭까지 키워내는 정도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왠지 허망했고 슬펐다. 작고 소중한, 부드럽고 말랑한 생명체가 온 집안을 총총 누비고 다니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한데. 너무 불쌍했다.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정을 붙이고 마음을 나눠준 생명체의 '죽음'이었다. 축 쳐진 몸으로 세상을 떠난 병아리를 박스에 담아두고 그 누구도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 박스를 들고 유유히 집을 나선건 바로 아빠였다. 결국 아빠도 그렇게 묵묵히 뒤처리를 담당함으로써 몫을 다하셨다. 아마 흙에 묻어준 걸로 기억한다. 그 뒤로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면서 잊고 있던 병아리의 존재. 그리고 지금 내게 있는 두 명의 병아리 같은 존재의 딸들. 둘 다 신체는 건강하지만 첫째는 마음의 병이 있다. 이 얘기는 아마 다른 브런치 북을 통해 풀어내보려 한다. 엄마와 함께 병아리 모이를 찾으러 그날 하염없이 걷던 거리처럼 지금 난 첫째에게 꼭 맞는 모이를 찾아주고 싶어서 여기저기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헤매고 있다. 지금까지도 긴 여정처럼 느껴지지만 앞으로의 여정은 더 길거라는 것을 엄마인 난 직감적으로 안다. 마음이 아픈 첫째는 그때의 그 병아리가 할머니 뒤를 쫓아다녔던 것처럼 나의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그녀가 유일하게 가장 편하게 마음 둘 곳은 엄마의 품이기 때문에. 나를 먼저 돌보고, 또 그녀를 돌보며, 지치지 않고 이 길을 걸어 나가길, 오늘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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