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와 가는 소풍

엄마는 근무 중

by Caraish

작년 가을학기에 킨더카든(kindergarten)에 들어간 둘째는 언니와 다르게 자유분방하고 독립적이다. 아침에 등교준비를 할 때면 혼자서 야무지게 머리를 묶고 소근육 집중력이 꽤나 필요한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일도 도움 없이 척척 잘 해낼뿐더러 처음 킨더가든에 입학했을 때 엄마 다리를 붙들지 않고 교실로 씩씩히 걸어 들어가는 적응기간도 첫째인 언니보다 훨씬 짧았다. 그래서 당연히 학교에서 있는 필트립 (field trip), 소풍도 엄마 없이 씩씩히 잘 갈 거라고 믿었다.


아이들이 미국 공립학교에 입학하면서 당황했던 점 중 하나는 부모의 참여도, 발룬티어가 생각보다 많이 요구된다는 점이었다. 프리스쿨에 다닐 때는 학교 행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마더즈데이(Mother's Day)/ 파더즈데이(Father's Day)에 아이들과 같이 점심 먹는 이벤트, 크리스마스 공연, 뭐 그 정도가 전부였다. 다른 말로 하면 워킹맘으로서 전혀 부담이 없었다. 하지만 킨더가든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학교 문턱에 드나들 일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 말인즉슨 상사의 눈치를 볼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말이나 저녁시간에 있는 학교행사들을 전부 제외하고서라도 한 달에 한 번씩 부모들을 초청해 공개수업을 하고, 일 년에 세네 번 있는 필트립에도 아직 손이 많이 가는 킨더가든 아이들을 위해 부모들이 돌아가면서 발룬티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부모가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사정과 스케줄이 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도 충분히 이해해 주실뿐더러 한 필트립에 발룬티어로 지원할 수 있는 부모의 수도 어차피 네다섯 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한 달에 한번 공개수업은 첫째 때부터 웬만하면 꼬박꼬박 참여했다. 공개수업 첫날, 부모님들이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본인의 엄마 아빠를 목 빠지게 기다리며 찾는 아이들의 눈망울과 몸짓, 그리고 본인의 부모님이 오시지 않은 걸 깨달은 순간의 실망감과 절망감을 목격하고는 미리 남편과 얘기해서 둘 중에 한 명은 꼭 참석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하지만 소풍은 달랐다. 한 학급에서 많아야 네다섯 명 만의 부모가 인솔자로 참석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첫째 때는 아이에게 미리 잘 타일러서 엄마가 못 갈 거라고, 미안하다고 얘기하며 토닥여줬다. 다행히도 첫째는 끄덕이며 이해했고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둘째도 그러려니 했다. 똑같이 토닥이며 얘기해 줬는데 그녀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대성통곡을 했고 그 뒤로 며칠간 계속 엄마가 소풍에 와줬으면 좋겠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호소하는가 하면 자기는 벌써 선생님에게 우리 엄마가 올 거라고 (물론 엄마와 합의 없이) 말해놨다고 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는지 둘째 담임 선생님께 이메일이 왔다. 어떤 폼을 작성해서 내야 하는지 친절히 가르쳐주시면서. 이쯤 되니 갈등이 생겼다. 어찌해야 하는가. 남편과 상의하다가 결국 가기로 했다. 그래 가자. 까짓것. 둘째 소원한번 들어주는 셈 치고 모든 절차를 마치고 담임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I'm in!"


그렇게 인솔자가 된 나는 스물다섯 명의 반 아이들, 그리고 담임 선생님을 비롯한 네 명의 다른 부모들과 함께 3월의 햇살 좋은 어느 날 샌디에고 동물원으로 향했다. 난 둘째를 포함한 다섯 명 아이들 담당이었다. 소그룹으로 흩어져서 코스 별로 이동할 때마다 내 허리쯤 되는 다섯 명의 머리가 있는지 항상 확인했고 점심시간에는 아이들과 함께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샌드위치를 와구와구 입에 구겨 넣었고 여자아이들을 우르르 데리고 화장실에도 데려갔다. 다행히 둘째는 틈날 때마다 내 옆에 와서 허그해 주고 손잡아주며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함박웃음을 보니 하루 일에서 휴가 내고 같이 오길 잘했다 싶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찰나 문득 스치듯 어릴 때 생각이 났다. 손때가 꼬깃꼬깃 많이 닿은 어릴 적 가족 앨범을 보면 난 워킹맘인 엄마를 대신해 외할머니와 함께 유치원 소풍을 가곤 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 당시 소풍은 양육자의 동반 참석이 요구되었던 듯하다. 소풍날 당일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지는 않다. 하지만 앨범이 말해주는 분명한 건 사진 속의 난 웃고 있지 않다. 무뚝뚝하다 못해 뾰로통한 표정으로 외할머니와 어색한 스킨십을 하고 취한 포즈가 대부분이다. 다른 친구들은 다 자기 엄마랑 왔는데 할머니랑 온 일곱 살의 난 아마도 퍽 서운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맞벌이 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집에서 언니와 나를 주로 케어해 주셨던 분은 우리 가족과 한 지붕에 사셨던 친할머니이셨고, 몸이 조금 불편하신 친할머니를 대신해 소풍 등 그 밖의 유치원에서 개최하는 여러 대외행사는 외할머니가 참석하셨던 것 같다. 엄마도 나름대로의 노력을 다하셨다. 유치원에서의 생일 파티, 학예발표회 등등의 행사처럼 중요한 순간에는 엄마가 사진 속에 꼭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엄마는 잠깐 옆 반 선생님께 아이들을 맡기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후다닥 딸들의 중요한 행사들을 참여하시고는 다시 일로 복귀하셨다고 했다. 내 기억에 엄마는 그때 운전도 안 하시고 차도 없으셨는데 아마 택시를 타고 이동하셨을까. 옆반 선생님께 어려운 부탁을 하기까지의 용기, 교문을 나가시면서 제시간에 맞춰 가야 한다는 압박감, 딸과 접선해서 멀리서 손 흔들어줬을 때 그 미소에 녹아내리는 안도감, 그리고 다시 교문을 들어서며 쿵쾅거리는 맘 졸이는 마음 모두 너무 이해 간다. 지금 내가 딸들을 키우며 꽤 자주, 직접 피부로 느끼며 경험하고 있는 일들, 감정들이기 때문에.


그때의 엄마와 내가 다른 점이라면 난 지금 두 딸을 키우며 엄마처럼 옆에 엄마가 없다는 것. 시어머니도 곁에 가까이 계시지 않다는 것. 엄마에게 딸내미 소풍을 대신 같이 가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던 그 당시 엄마가 부럽다. 물론 3세대가 한 지붕 아래 북적거리며 살아가던 대가족 체제 안의 1990년대와, 30년이 훌쩍 지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나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건 무리수인 것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린 시절 같이 소풍에 와줄 수 있었던 건강하신 외할머니가 계셨던 것,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나를 사랑해 주셨던 부모님, 그리고 할머니가 계셨음에 감사하다. 아마도 그게 지금의 내가, 몸은 부모님과 떨어져 있지만 하루하루를 워킹맘으로 살아내는 원동력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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