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클의 루비

모범생의 일탈

by Caraish

누군가가 나에게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20년 전의 나나 지금의 나나 대답은 한결같을 것이다.

"글쎄."


나는 누군가의 열렬한 팬이 되어본 적이 없다. 팬클럽에 가입한 적도 당연히 없다. 다르게 말하면 난 뭐 하나에, 누구 한 사람에 깊이 퐁당 빠지는 성격이 아니다. 나와 다르게 일곱 살 된 딸내미는 벌써 Taylor Swift (테일러 스위프트)를 심각하게 좋아한다. 본인 스스로를 "Swifty" (테일러 스위프트의 열렬한 팬을 지칭하는 말)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간혹 선정적인 가사 내용 때문에 들려주지 못하는 노래들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각종 앨범과 노래는 웬만하면 다 외우고 있다.


난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폭이 넓게 물드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좋게 말하면 대체로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아 한결같고 침착한 편이고 누군가 보기엔 미지근하고 열정 없어 보일 수도 있겠다. (사실 이 부분은 결혼과 임신,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많이 달라졌다. 나에게 이런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존재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나의 이면을 발견하게 해 준 남편과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1998년 가을, 초등학교 5학년인 내 또래 아이들은 인기가요집을 들고 다니며 달달 외웠고 젝스키스, H.O.T, 유승준 오빠, 그리고 S.E.S. 와 핑클 언니들에게 푹 빠져 있었다. 난 그들 중 한 명이 아니었지만, 곧 다가오는 학급 장기 자랑을 위해 누구라도 콕 집어 연습을 해야 했다. 친한 친구들과 모여 비상 회의를 했다. 누구로 갈 것이냐. S.E.S. 이냐 핑클이냐. 중대 사항이었다. 핑클 팬이 더 많기도 했고 우리는 다섯 명이었으니 아무래도 세 명보다는 네 명 파트를 나누는 게 쉽지 않겠냐는 결론 하에 우리는 핑클 언니들을 택했다. 선곡을 마친 뒤 우리는 연습에 매진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이보다 더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우리는 틈나는 대로, 그리고 방과 후에도 친구들 집에 모여서 연습을 강행했다.


지금 루비의 가사를 보면 어이상실이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가사의 정황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해 보이기까지 하다. 현 남친인지 구 남친인지 불분명한 남자, 여하튼 내가 좋아하는 그놈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겨서 아쉽고 슬프지만 그놈을 새 여자에게 순순히 양보하겠다는 내용이다. 쿨하게 보내주겠다는 게 아니라 심지어 나를 떠나간 그놈을 기다리겠단다. 시원하게 펑펑 울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굳이 울지 않으시겠단다. 여하튼 거슬리는 구절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 삼십 대의 나라면 이 여성을 앉혀놓고 심각하게 연애 상담을 해주겠지만 열두 살의 나는 가사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동작과 안무를 예쁘게 완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팀이 돋보이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연습에 매진한 지 며칠이 지났을까. 조금은 우울한 루비의 멜로디에 서로의 동작이 착착 맞아갈수록 열두 살 소녀 다섯 명의 유대감도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고대하던 장기 자랑 날 전야가 되자 우리는 모든 책상과 의자를 뒤로 밀어놓고 울퉁불퉁하고 낡은 나무판이 돋보이는 무대를 만들었다. 그럴듯해 보였다. 장기 자랑 날 아침이 밝았고 우리는 다들 나름 한껏 꾸민 모습으로 교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우리 순서가 되기까지 얼마나 떨렸던가. 드디어 핑클의 루비가 호명되었고 우리는 연습한 동작을 마음껏 뽐냈다. 막상 우리 차례가 끝나자 언제나 그렇듯 아쉬움이 몰려왔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사실 그 당시의 난 가요보다는 동요, 가요집보다는 음악책이 더 편한 아이였다. 가끔은 또래 아이들이 일삼는 장난을 유치하다고 여겼던 '애늙은이'에 가까운 열두 살 소녀였다. 하지만 한창 사춘기가 시작될 예민한 그 시기에 또래 집단에 소속되는 것, 그래서 장기 자랑을 앞두고 한 팀에 속해 연습하는 것은 다른 일을 제쳐두고 달려갈 만큼 묵직한 중대사였다. 게다가 공부가 학생의 주 업무라고 세뇌된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에게 공부가 아닌 다른 것, 그것도 수업 시간에 교실에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벌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히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에게는 일탈에 가까웠다.


어른이 된 지금 우리는 일탈에 목마르다. 어른의 주 업무인 일, 그리고 엄마의 주 업무인 육아에 허덕일 때면 일탈을 꿈꾸고 계획하고 고대한다. 나는 주로 일탈도 계획적인 편이지만 즉흥적인 일탈도 그만의 매력이 있다. 코로나 시기가 유난히 힘들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신나고 짜릿한 일탈을 마음대로 계획할 수도, 즐길 수도 없어서가 아닐까 싶다. 고대할 휴가가 없다는 것은 직장인에게 꽤 잔인한 일이다. 그래서 휴가를 다녀오면 심심찮게 곧바로 다음 휴가지를 생각하는 게 아닐까 (저만 그런가요). 올해도 벌써 삼분의 일이 훌쩍 지나간다. 여러 가지 바쁜 일들로 인해 최근에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지 못했다. 곧 있을 이사와 가족들 방문, 아이들 여름캠프및 또 다른 공부를 시작하는 바쁜 여름을 지나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문턱쯤 되면 한국에 방문할 계획이다. 올해 꾹꾹 눌러둔 일탈까지 합쳐서 두 배로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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