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먼저 읽었고 그리고 영화로도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비교적 책보다는 영화를 더 수월하게 본 것 같다. 나는 영화에서처럼 공유와 같은 비교적 자상한 남편과 결혼을 했다. 병원에서 의료기사로서 면허를 이용하는 직업군이기에 전문직으로 분류되는 직종에서 출산으로 인한 잠깐의 경력단절을 극복하고 어쨌든 지금의 나는 계속 일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지영을 보면서 밑바닥 같은 순간의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애처로운 감정이 들었다.
오래된 기억이 하나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운동장에 불쑥 들어온 어떤 아저씨가 "너는 참하게 생겨서 다방에서 일하면 인기가 많겠다" 하셨다. 나는 '인기' 라는 말만 듣고 "고맙습니다" 라고 했다. 뭔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혼이 날 것만 같았다. 옆에서 친구들이 "다방" 작게 속삭였고 친구들과 나는 순간 일제히 "으~아아아!!!" 소리치며 도망갔었더랬다. 지금도 그 에피소드를 기억하는 걸 보면 참 당혹스러운 사건임이 분명하다. 성인 남자가 초등학생 밖에 되지 않는 나를 뭔가 성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은 그 떨쳐내고 싶은 눈빛 같은 것이라 해야 하나. 왜 어린 여자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야 하나? 마치 '칭찬' 이라도 하듯 말이다. 학교라는 보호된 공간에서 마주친 뭔가 노골적인 표현. 참 불쾌한 기억의 시작점인 듯하다.
그리고 대학시절 나는 김지영처럼 취직에 목말라 있었다. 의료기사 국가고시 시험를 열심히 준비했고 면허를 취득하고 다행히 졸업과 동시에 종합병원에 입사를 했다. 이후 전쟁 같은 업무가 시작되었고 거기에 적응할 수 있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다 결혼할 사람이 생겼을 때 병원의 경우 여성의 비율이 높은 편이라 자연스럽게 일과 육아를 동시에 잘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 했었다. 김지영처럼.
이렇게 영화를 보면서 김지영과 닮은 내 모습을 보는 건 그냥 줄곧이다. 거의 모든 것들이 아주 닮아 있어 무엇이 가장 닮았다 하기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다만 닮은 모습들 중에서 가장 애잔했던 것은 김지영 씨의 [고심] 이었다. 육아와 일을 동시에 하기 위한 [고심]. 나는 출퇴근 시간에 대한 깊은 고민을 결혼 전에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근무하면서 9시 출근, 6시 퇴근. 그 당연한 것이 안 되는 상황이 없었으니깐. 출산 전에는 말이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너무 오랜 시간 맡겨야 한다는. 우리 아이가 제일 마지막으로 하원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애가 타는지 말이다. 근무했던 병원들이 집근처이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아침시간에 봐주실 베이비시터를 여기저기 알아보고 탄력근무제를 시행하는 병원이 있어 그나마 근무시간을 단축해서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럼에도 아침시간에 봐주는 베이비시터 급여와 탄력근무로 줄어든 월급 그래서 그다지 남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정신없이 보내야 했었다.
"그래도 나는 잘 도와주는 편이잖아" 남편이 나와 다툴 때 항상 하는 말
"그래 맞아, 그건 내가 인정하잖아. 잘 도와주는 편인 거 알아" 이건 내가 하는 말
안다. 굳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도 결혼 후 변화가 많은 나를 누구보다 걱정해주고 있고 '나' 만큼이나 아이를 사랑하고 있고 "목욕 내가 시키려고 오늘 일찍 왔는데" 하고 들어오던 공유의 마음처럼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래서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지' 하는 어느 가족 공익광고 같은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나는 그렇다. "내가 도와 달라고 할 때 쫌 도와 달라고". 그 말인 즉, 도와줘도 도움이 안 될 때가 많은 이상한 일들이 많다 보니.. 분명히 나는 '똑같이 나누어해야 한다'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다. 그 공익광고에서 '같이' 라고 했지 '똑같이" 라고 한건 아닌데. 무튼 '잘 도와주잖아' 하는 남편을 굳이 지적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다. 결혼을 해보니 '잘 도와주는 편' 그게 얼마나 고마운 것이며 눈물겨운 변화임을 안다. 그럼에도 어린이집 등하원 그 하나를 위해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했는데 남편의 변화는 소소해 보이는 못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나는 남편이 요런 이상한 '내 마음의 변화'를 알아주길 바란다. 심술궂은 변덕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나의 잠깐의 경력단절의 순간은 어떤가. 뭔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돈을 깎아 먹고 있다는 생각에 위축되었다. 매달 아파트 대출금은 빠져나가고 있고, 첫 아이라 준비해야 하는 육아용품은 너무도 많고, 고가이며, 사회생활을 이때까지 줄기차게 해온 나로써 남편이 요즘 같은 세상에 얼마나 힘들지도 안다. 그래서 집안일에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얼마나 부지런을 떨었는지, 열이 나고 시뻘겋게 우는 아이를 안고 병원에 가고 약을 타고 먹이고 재우고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날도 저녁을 미처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미안함이 들었다. 그가 나를 눈치 보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단 한 푼의 경제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왜 그렇게 스스로에게 압박이 되었는지. 나는 그랬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그녀가 '나' 같을 수밖에 없었다. 육아와 일을 동시에 하기 위한 그녀의 [고심]이 바로 나의 [고심]이었으니깐. 남자 탓, 시댁 탓이라는 게 아니다. 가정이나 육아를 부정하고 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참 복잡해진다. 그렇지만 남편과 이 영화를 함께 보러 간 것. 다 보고 나서 남편이 "이상한 영화가 아니네" 하고 말해주어서 "우리는 그래도 저런 힘든 때를 조금은 지나온 것 같지 않냐"라고 위로해 주어서 고마웠다. 나 또한 82년생 김지영 영화가 '나만 힘들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에 감사한다. 걱정하는 남편에게 "오빠 걱정했겠다. 나 치료받을게. 뭐부터 하면 돼?"라고 해서 눈물 났다.
그래 어쩌면, 82년생 김지영이 아이를 재워놓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베란다에서 멍하게 그렇게 있었던 그 순간들을 나는 조금은 지나온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 잠깐의 소강상태 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잘 적응되었고 유치원은 비슷비슷한 환경이니깐 그렇지만 초등학교라는 큰 산이 있고, 예상치 못한 다양한 변수와 환경들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많은 가정들이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경험치를 획득해 나가며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는 것 같다. 다 같이 힘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