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던 밤, 우리는 라밤바를 불렀다.

"그 시절 우리가 지불한 가장 아름다운 낭만의 대가"

by 에스더리


소설 〈잃어버린 너〉가 교실을 관통했다.
베개가 흠뻑 젖을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책은 돌고 돌았고, 눈물도 함께 돌았다. 어느 순간 우리는 모두 그 소설의 여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날마다 축제의 연속이었다.

10.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리고 나의 라밤바

이 시골 구석까지 황홀한 바람이 불어왔다.

당시에 가장 핫했던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을 우리 학교에서 촬영하게 된 것이다.
가왕 조용필 님까지 직접 오셨으니, 그야말로 매 순간이 축제 같은 여고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박남정과 장국영, 그리고 영화 〈라밤바〉에 홀딱 빠져 있었다.

단짝 친구와 일주일 내내 극장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사람 없는 쪽, 모서리에 둘이 앉아 훌쩍 거리며 다음 대사가 나오기도 전에 미리 받아치는 경지에 달했다. 그것이 내 생애 가장 빛나던 암기력이었을 것이다.

가슴을 찢어지게 아프게 했다가 흥겹게 했다가 들었다 놨다 하는 음악과 리듬, 애잔한 로맨스도 다 좋았지만, 내 시선은 뜻밖에도 주인공 리치의 엄마에게 머물렀다.


당시 우리 엄마들의 파마머리와는 급이 다른, 풍성한 밤색 컬러에 우아한 컬이 잡힌 헤어스타일, 가난한 엄마의 역할 가운데도 숨길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세련된 아우라, 당당함, 날씬한 몸매를 타고 흐르는 옷맵시, 그녀는 내게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미래의 워너비'였다.


여주인공의 이미지는 살짝 실망했지만, 그녀의 진주 귀걸이는 눈에 띄었다.


극장 구석에서 내가 배운 것은 영화 대사만이 아니었다.

미래의 나를 향한 근사한 동경이자, 내 속에 잠재된 색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 뜨거운 열망이 한번 사고를 쳤다.


11. 팬레터의 역습


친하지 않던 친구였어도 팬심으로 하나가 되던 시절.

수업 시간에 박남정 가수님께 꾹꾹 눌러 너무 몰입해서 팬레터를 쓰다가 담임 선생님께 들키고 만 것이다.


여고 발령이 처음이셨던 모기 목소리의 여리여리한 선생님은, 팬심을 빼곡히 채우던 우리 같은 '다채로운' 아이들을 감당하기가 벅차셨던 것 같았다.


결국 선생님의 인내심이 무너졌고, 팬레터는 압수당했다. 그리고 반 전체에 단체 벌을 세우셨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났지만, 더 큰 고역은 따로 있었다. 반성문.


그것도 압수된 팬레터와 똑같은 분량, '세 장'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싶어 풍선 끄트머리처럼 삐죽하게 오므린 입술로 억지로 칸을 채웠지만, 헤어질 때는 서로 눈물을 흘리며 사제간의 정을 나누었다.


12. 마니또 게임과 교회 습격 사건


낭만에 취해 살던 우리에게도 '실전'의 기회는 찾아왔다.

학기말 고사를 마치고 방학 직전, 이웃 남고와 반 단체 마니또 게임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곧바로 '다나'를 낚아챘고, 내 절친은 로지. 그녀의 마니또는 '밥'이 되었다.


어느 날, 로지와 경양식집에서 정식을 먹고 후식으로 나온 인스턴트커피를 앞에 뒀다. 완전 설렜다. 프림과 설탕을 2:2:2로 맞추며,

흘릴까 봐 덜덜 떨리는 그 신중한 손길, 그리고 남은 프림을 작은 스푼으로 몰래 퍼먹는 고소한 재미까지!


어른이 된 것처럼 커피를 휘휘 저으면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로지의 마니또 '밥'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오빠는 이렇구 저렇구, 아 진짜 어쩌구 저쩌구..."

한참 수다를 떨며 큭큭대는데, 옆 칸 천장 위로 담배 연기가 슬슬 올라오는 게 보였다. 설마... 고등학생인데? 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갑자기 우리 자리의 커튼이 확 열리더니,


바로 그 '밥' 오빠가 입술을 비틀어 깨물면서 우리를 가소롭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다 했냐?"그 낮은 목소리에 우리는 굳어버렸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싹싹 빌었다.


그리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발랄했다.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된 날,

나는 '김완선'이라 불리던 친구를 데려갔다.
복도 끝에서 고개를 꺾으며 눈빛 연습을 하던,
그 시절 우리의 작은 스타.


전도사님이 인사를 시키며 아는 노래를 불러보라고 제안하셨다. 잠깐의 머뭇거림 뒤, 슬쩍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한 번 튕겨보았다.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받아 적어 달달 외운 〈라밤바〉를 부르기 시작했다. '완선이'는 옆에서 현란하게 춤을 췄다.

예배 때 늘 피아노 반주를 하던 전도한 친구와 전도사님의 당혹스러운 표정, 처음 접했을 이런 분위기에 맞춰주는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아 몰라" 부끄러운 듯 쏜살같이 자리로 들어갔고, 남겨진 부끄러움은 누군가의 몫이 되었다.


13. 수포자의 고3, 그리고 낭만의 대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대학 입시가 그토록 피 터지는 전쟁터인 줄 몰랐다. 벼락치기면 다 되는 줄 알았던 철부지였다. 소박한 문화생활이라도 즐기겠다며 가끔 야자 시간까지 빼먹으며, 낭만이라는 이름의 꿀을 빨며 보낸 여고 시절. 그 끝에 마주한 학력고사 결과는 지독하리만치 정직했다.


성적표를 받아 든 순간, 잠시 눈앞이 캄캄하고 허탈한 바람이 가슴을 쏴악 훑고 지나갔다.


낭만에는 확실히 대가가 따랐다. 후회는 없었다.


시간을 통째로 되돌린다 해도, 나는 아마 똑같이 <라밤바>를 부르고, 똑같이 박남정에게 편지를 쓰며, 그 아름다운 낭만의 대가를 기꺼이 지불했을 것이다.



#낭만파 수포자의 좌충우돌 대학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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