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은 시간도 사실 꿈꾸는 시간이었다.

오늘 쓸 수 있는 행복은 남김없이 다 쓸 테야

by 에스더리

7. 교실 안의 브로드웨이.


고등학교 수업 시간은 마이너스 1교시부터 시작되었다.


복도 저 끝에서 김완선의 눈빛을 흉내 내며 목을 꺾어 들고, 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며 다가오는 친구의 모습으로 하루 일과가 유쾌하게 시작되곤 했다.


교실로 들어가면 당대 최고의 미녀들인 브룩 쉴즈, 왕조현,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가 한 반에 다 있었다. 예쁜 애 옆에 더 예쁜 애가 있는 비주얼 쇼크의 현장이랄까.


그 틈바구니엔 보이시한 매력으로 온통 '담다디'를 외치게 만들었던 이상은도 있었다.

오히려 여고에서는 보이시한 스타일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교실은 늘 난장판이었지만 묘하게 질서는 딱 잡혀 있었다. 김완선 말고는 수업 시간 방해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화려한 교실의 화룡점정은 20대 중반의 멋쟁이 여선생님 3인방이셨다. 그분들이 교실로 들어오실 때면 그곳은 영락없는 패션쇼장이었다.


8. 소피 마르소를 이길 무기 한 가지


선생님들은 교실 안의 브룩 쉴즈 4인방을 이겨야 했고, 우리는 선생님들의 세련된 패션과 화장을 부러워하며 은근히 따라 하고자 했다. 물론 고3 졸업 때까지 실제로 화장할 용기를 낸 아이는 거의 없었지만.


소피 마르소가 앞머리를 다 까는 머리띠를 하고 교실에 나타나면, 다음 날 교실엔 앞이마가 번들거리는 친구들이 속출했다.


왕조현이 머리핀을 귀 옆으로 한쪽에 꽂으면 누군가 슬며시 머리핀을 한쪽에 꽂고 나타났다.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무슨 예쁜 것들' 앞에서는 그저 다 같은 언니, 동생, 친구 같았던 참 정겨운 시절이었다.


아니 그런데 세상에,

이제 다시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일단 반대!


그나마 소피 마르소를 이길 수 있는 것은 나만의 사복 패션뿐인데,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결사반대한 친구들이 많아서였는지 다행히 교복은 우리 다음 학년부터 입는 것으로 정해졌다.


우리는 소심하지만

자유롭게 개성을 뽐낼 수 있는 마지막 사복 세대였다.


9. 끔찍이도 싫었던 두 과목, 그리고 나만의 공부법


수학과 체육 시간, 그리고 아침 운동장 조회 시간만 빼면 거의 모든 시간이 즐거웠다.


운동장 조회 시간에 안 나가는 아이들을 잡겠다고 선생님들은 각 교실을 감찰했고, 우리는 어떻게든 안 들키려고 커튼 속에 숨거나 어딘가에 매달려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조마조마해가며 조회를 피하고 싶었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그때는 진지했다.


체육 시간은 말도 못 하게 싫었다. 배구를 하면 손가락 끝으로 공을 받아치다가 선생님께 '공이 뜨겁냐'는 소리를 들었고, 100미터 달리기는 전교 꼴찌였다. 몸치라 달리는 폼부터 모든 게 이상해서 늘 웃음거리였다.


십여 년 전 여고 동창 친구가 밴드에 올려준 글과 그림


수학 시간은 또 어땠나. 내 번호와 날짜가 같은 날은 어김없이 배가 아파왔다. 선생님이 꼭 날짜와 같은 번호를 불러 칠판 앞으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날만큼은 조퇴가 최선이었다.


그래도 새 교과서를 받으면 예쁜 그림이 그려진 포장지로 정성껏 커버를 만들었다. 교과서 안쪽에도 색색의 펜으로 줄을 긋고 별을 다섯 개씩 그려가며 알록달록하게 꾸몄다.


노트 하단 모서리에는 모든 장마다 조그맣게 손그림을 그려놓았다.

책장과 공책을 차르르 넘기면 그림이 움직이는 만화가 되는, 그게 나만의 예술적인 공부 방식이었다.


시험 기간에는 독서실에서 날을 샌다며 책상에 엎드려 잤다. 그래서인지 아침에는 배도 빵빵하고 다리도 부은 채로, 텅 빈 머리를 가지고 기말고사를 치렀다.


결과는 어김없이 교실 맨 뒤 환경 미화판에 쫙 붙여졌다. 하지만 뭐, 그게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냥 한마디 슬며시 얹고 위로받았다.

"나 공부 하나도 안 했잖아 힝"

몇 시간만 속상해하면 금방 아무렇지 않아 졌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1등 한 친구나 꼴등한 친구나 다 행복해 보였다.


내 교과서 귀퉁이의 작은 그림들처럼,

내 사춘기는 성적표 밖에서 살풋 빛나고 있었다.


바빠서 화투는 끊었고,

우리는

오늘 주어진 행복을 아낌없이 써버렸다.


그 시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전 02화인형 그리던 고사리 손이 화투를 집어든 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