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정식으로 영어를 배웠다. 영어가 교과과목으로 처음 시간표에 적혀있던 시절, 나는 영어를 해석하긴커녕 읽을 줄도 몰랐다. 고작해야 알파벳을 외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당시 반 친구 중에서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을 다니며 또는 집에서 방문학습 등으로 기초 영어를 공부했었다.
영어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항상 날짜에 맞는 숫자나 행운의 숫자 등으로 학생을 일으켜 세웠다. 큰 소리로 읽어야 했는데 그게 참 고역이었다. 읽을 줄 모르니까 말이다. 한 번은 “일레븐”이라고 나를 불렀다. 물론 나는 그게 나를 뜻하는지 몰랐고 혼쭐이 났다. 일레븐도 모르냐면서 구박을 받으면서 말이다. 그게 너무 창피하고 서러워서 영어 시간 전 친구들에게 어떻게 읽는지 물어보고 교과서를 한글로 빼곡하게 채워 놓곤 했다. 짝꿍을 졸라 A부터 Z까지 발음 기호를 적어 달달 외우기도 했다. 덕분에 간신히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성인이 됐다. 일상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번역기가 좋아져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다 어느 날 독일로 출장을 가게 됐다. 통역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두려움이 덜컥 찾아들었다. 낯선 환경에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가 오고 가며 시야는 좁아졌고 사람을 피하기에 이르렀다.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데 ‘onion’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토록 양파 칩을 먹어대며 외쳐댔던 어니언!! 그게 떠오르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리며 손짓 발짓해가며 주문을 했다. 그 이후론 일행과 딱 붙어서 다녔다. 심지어 화장실도 참고 참으며 들락거렸을 정도.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겨우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말할 때 단어가 몇 개 들리는 정도였다. 단어 몇 개로 유추하며 소통이 되고 했지만 여전히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일주일이 지나며 서서히 들려오던 단어에 힘을 얻었고 출장에서 돌아와 열심히 영어 공부하겠다 다짐했다. 3일 정도는 말이다. ‘참나,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무슨 영어야.’ 그렇게 또 영어와 멀어졌다. 이후에 스웨덴 출장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고 3일간 또 열심히 나를 몰아붙였다. 덕분에 해외 출장을 꺼리는 사람이 됐다.
살랑이는 바람이 심금을 간질이던 어느 봄, 종로에서 아리따운 여성과 손잡고 데이트를 즐기던 때였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뛰어다니던 외국인과 눈이 마주쳤다. 속에선 절로 신을 찾았다. ‘오~주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쏼라 쏼라~에어포트”
다행이었다. 에어포트라는 단어를 들을 수 있어서 그 외국인이 공항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단 걸 알았다. 이럴 때 멋진 모습으로 외국인을 상대해줘야겠다 생각했다.
“저스트 모먼!!”
그 이후 나는 말을 멈췄다. 머릿속에 있는 대화가 나오지 않는 마법이 작용됐다. 곧바로 스마트폰을 켜고 공항으로 가는 길을 검색했다. 여기서 또 한 번 다행이었던 것은 당시 종로는 교통 통제로 공항 가는길이 몇 개 안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가장 빠르고 편리하게 갈수 있는 방법은 택시였고 그 외국인에게 택시를 잡아줘 보냈다. 물론 한국말로 기사님과 유창하게 교통 상황을 논하면서 말이다.
몇 번의 식은땀을 교훈 삼아 최근 영어 교재와 강의를 듣고 있다. 어릴 때 배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배움의 기쁨을 만끽한다. 다만 누군가 말을 시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4개 국어를 하는 지인이 말하길 외국어는 도구이자 수단이라 했다. 게임 속 퀘스트 같은 걸로 필요와 재미를 느끼면 금방 도다른다고 했다. 울렁증 극복도 별거 아니라면서 말이다. 그 말을 곱씹으며 ‘울렁증 따위 별거 아니네’라고 나를 위로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이 시간,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옆자리로 두 명의 외국인이 앉았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말을 못 들은척하고 있다. 계속 커피만 마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