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멀다하고 꿈을 꾼다. 물론 대부분의 꿈은 눈을 뜨고 한 시간을 채 기다리지 않고 기억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 꿈은 달랐다. 해가 꾸물꾸물 거리는 정오 시간이 다 됐는데 여전히 기억 속에 머물고 있었다. 마치 잊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새드 엔딩 영화 속 여주인공 같았다.
꿈속에서 오른팔을 잃었다. 모든 꿈이 그렇지만 어떤 개연성이나 연결성, 심지어 현실성이라곤 단 1도 없었다. 첫 장면에서 버스에 올랐고 창밖을 바라보며 허밍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에서 독일 명품 자동차 벤츠를 운전하고 있었다. 레코드 바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심취해 눈을 감고 운전하던 나는 기어 변속을 위해 눈을 뜬 순간 알게 됐다. 오른손이 잘려나간 것을 말이다.
주말답게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으로 향한다.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 눈곱 낀 상태로 목욕탕으로 가는 맛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엄청난 게으름과 귀찮음을 몸에 장착한 채 때를 벗기는 그 맛을 말이다. 파란색 추리닝 바지와 어긋나게 채워진 스포츠 셔츠, 거기에 부스스한 머리를 휘날린다. 일정한 규칙과 규율 따윈 무시한 아침의 사자머리는 속도가 관건임을 잘 알고 있다. 바람을 가르며 페달을 밟아야 사자머리는 그럴듯한 모양새를 보인다. 여유를 부리며 산책하듯 자전거를 타고 가다보면 지나치는 사람들의 웃음과 산책 나온 강아지들의 하울링을 듣는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긴 하지만 몇 번의 경험으로 충분하다.
룰루랄라 때를 벗긴다. 가끔 털도 나지 않은 꼬맹이들의 물장난으로 찬물이 날아와 움찔거리긴 하지만 은근슬쩍 샤워기 방향을 틀어 복수하는 맛이 일품이라 용서할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건 탕안에서 헛기침과 함께 몸을 문대는 아저씨들이다. 몇 번 눈을 부라리며 눈치를 주지만 아직 연륜에서 나오는 철판 내공을 따라잡진 못하는 듯하다. 포기하고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올 것 같은 소변보는 동상이 세워진 사우나에서 몸을 지지고 나온다. 세상이 다 밝아 보인다.
소년의 소변 영향인지 사우나의 영향인지 출처 불분명한 개운함을 안고 길목에 자리한 카페로 향한다. 가사가 없는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조용히 커피를 음미하고 나와 다시 페달을 밟는다. 몇 미터 앞에 신호등이 바뀌었다. 그 순간 오래전 봤던 TV 속 자전거 경기를 떠올리며 클라이밍과 다운 힐을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상상 속에서 혼자 땀을 흘리고 허벅지에 한계를 부여하며 달려 나갔다. 신호등을 건너려는 찰나, 직사각형의 하수구 틈에 자전거 타이어가 끼어버린다.
참 영화 같은 일이었다. 한 5cm정도 될라나? 그 작은 틈에 너무도 딱 맞는 자전거 타이어라니 말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다지 과학적이지도 논리적이지 않은데 과학적인 어떤 단어가 떠올랐다. ‘관성’. 그렇게 나는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날아갔다. 그 짧은 순간, 아침에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왜 유독 오늘의 꿈만 잊히지 않았을까? 이런 암시가 숨어있던 건가? 어쩌면 신의 전언이었을까?
낙하지점을 찾아 버둥거리던 몸에 명령을 내렸다. ‘포기하면 편해. 근데 오른손은 위험하다니까 손 짚고 넘어지진 마.’ 다행히 손을 짚진 않고 아스팔트에 키스를 날렸다. 지나치던 사람들과 차들은 모두 멈췄고 차안에 있던 사람들은 뛰쳐나와 나를 걱정했다. 그만큼 크고 높이,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날아올라 땅에 처박혔다.
꿈 때문이었을까? 손도 멀쩡했고 의외로 사지도 멀쩡했다. 이마빡이 조금 까지고 광대에서 피가 흐르는 것만 빼면 말이다. 병원에 가야하는 것 아니냐는 관람객과 청중을 뒤로 하고 자전거에 올랐다. 영화 촬영 중 배우들이 NG냈을 때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남들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른 길로 페달을 밟아 쪽팔림에서 벗어났다. 그제야 이마와 광대가 따끔거렸다. 담배를 한 대 피우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노을이 유난히도 붉었다. 언제나 오른쪽 주머니에 두었던 핸드폰이 없다. 꿈속에서 잘려나간 오른손은 내 명령을 듣는 손이 아니었다. 통신사의 명령을 듣는, 항상 내 오른손에 들렸던 핸드폰을 암시한 거였다. “노을 참 붉기도 하네. 피 때문인지 쪽팔림 때문인지 내 볼따구도 붉은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