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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내가 신문팔이 라니!

하찮은 도전 1 - 생존이라는 도전

입밖으로 꺼내기 우스운 이야기 이지만 사실 처음엔, 구글 아일랜드 법인, 페이스북 취업을 목표로 했다. 그 후에는 아일랜드에 있는 한국계 대기업들로 눈을 조금 낮추었다. 그러다가 물류와 재무라는 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현지 중견기업 사무직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비자와 경력이라는 문제. 거기에 잔고바닥이라는 악재가 겹치니 식당에 접시 닦는 일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설거지를 하는 일은 '한 두 달'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겨우 자리가 나기 마련이었고, 그 마저도 '인맥'에 의해서 유학생에서 친구 유학생으로 일자리가 전달되는 것이 '이 바닥 현실'이었다. 


구글이 아니라 진짜 많이 양보해서, 물류창고나 설거지도 할 수 있는데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문전박대'를 몇 차례 당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제 정말 내일의 끼니를 위해선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때 내 눈에 띈 같은 영어학원을 다니던 브라질 친구가 형광색 작업복을 입고 더블린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사실 친하지도 않았지만 그때 만큼은 친한 척 다가가 물었다.


"그 옷 뭐야?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거야?"

-"아니, 길에서 그냥 신문 파는 거야"


"이거 나도 하고 싶은데 조건이 어떻게 돼?" 

-"조건 같은 거 없어, 항상 사람이 부족하데 그러니 사장님한테 너 한다고 할게, 언제부터 할 거야?"


 "오늘! 아니 지금 당장!!"

- "알겠어, 바로 연락해볼게"


그 자리에서 구직 제안을 했고,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는 조건으로 자리가 남는 거리에서 신문을 팔기로 했다.

그렇게 '헤럴드'일간 신문의 거리의 세일즈맨으로 첫 일자리가 시작되었다. 실제로 일체의 조건 같은 건 전혀 없었고, 지정된 시간에 배정받은 거리로 나아가서, 배달 온 신문을 팔고 싶은 만큼 팔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1유로 20센트' 신문 한 장의 가격이었다. 신문의 가격은 신문가판대에서 사거나, 편의점에서 사거나, 내가 서있는 신호등 앞에서 신문팔이에게 사거나 어디서든 같았다. 그렇기에 굳이 차 타고 가던 사람들이 편의점에 들를 필요 없이, 신호등 앞에서 녹색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아차 신문 사야지' 하면서 사는 식이었다. 


판매금액에서 커미션은 50%를 내가 챙기고, 팔고 남은 신문과 남은수익의 50%를 사장에게 전달하면 하루의 신문 판매가 끝이 났다. 하루하루 생존에 필요한 현금이 필요했던 나에게 구걸을 제외하고, 정확하게 하루 벌어서 하루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보통 더블린 시내에서 신문 판매하는 동료들이 판매하는 부수는 반나절에 20부라 들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첫날부터 30부를 신청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보통의 각오로는 내가 이곳에서 살아 남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장에 학원을 다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밥 조차 먹을 수 없었다. 일주일 먼저 일 한 브라질 친구가 가르쳐 준 팁. 쉬지 않고 차 사이를 다니고, 최대한 친절하게 운전자를 상대하면 잔돈 정도는 팁으로 받고, 그날 배정받는 거리에 따라서 수익이 크게 달라진다 알려주었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했다. '더 재밌게 팔면 신기해서 라도 많이 사지 않을까? 나는 동양인이니까!' 그래서 30부를 받자마자 양손에 신문을 들고 신호등 앞에서 춤을 췄다.  춤이라기보다는 사실 어떠한 '구애를 위한 동물의 흔들기'에 가까웠다. 관광버스 춤도 아니었고, 클럽춤도 아니었다. 그냥 추고 싶은 만큼, 추고 싶은 방식으로 췄다. 달리는 자동차를 탄 운전자들이 짝짓기를 원하는 상대를 찾는 그런류의 몸동작을 취했다. 내가 내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느낌은 그러했다. 그만큼 나는 생존에 대한 갈망의 몸짓으로 철저히 흔들었다.  


그렇게 두 시간만에 29장을 팔고, 집으로 왔다. 마지막 한 장은 팔지 않고, 일부러 남겼다. 배정받고 난 뒤에 알게된 사실인데, 내가 배정받은 자리는 더블린에서 위험하다고 알려진 Summer hill 지역으로, 유학원에서는 학생들에게 가지 말라는 권하는 장소였다. 위험하다 했다. 누가 죽었느니, 갱단이 싸웠다니 하는 소문이 무성한 곳이라 무서웠다. 첫날이라 멋도 모르고 나왔지만, 60센트를 더 벌려고 계속 이 장소에 나오기 싫었다. 그래서 다른 지역으로 배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한 장을 남겼다.


 2시간에 29장! 다음 날 알고 보니 더블린 13개 구역. 20여명의 판매원 중에서  내가 제일 많이 팔았단다. 그렇게  나는 첫날부터 의도치 않게 인정을 받았고, 10센트의 수수료를 더 받고 계속 그 섬머힐이라는 위험한 동네에서 계속 팔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10센트 누구에게는 떨어져도 줍지 않는 돈이지만, 신문팔이로 첫발은 내딛는 나에게는 너무 컸다.


초심자의 운이었을까? 두 시간 만에 30부를 파는 날은 다시는 없었다. 반나절에 20부 내외로 파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왕 신문팔이가 된 김에 열심히 팔아보자며, 설령 한 장도 못 파는 날이 오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자고 다짐했다. 그런 다짐을 하고 바로 다음날 폭풍이 왔고, 서있지도 못할 만큼 강한 바람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신호등 앞에 서 있기는 했지만, 신문 자체를 옷 밖으로 꺼낼 수 없었고, 차를 세워서 창문을 여는 운전자도 없었다. 결국 신문이 젖을까 봐 커다란 주황색 옷 안에 넣어 꼭 껴안고만 있다가 한 부도 팔지 못했다. 


반나절을 내리  비를 맞으니 속옷까지 다 젖어왔다. 몸이 완전히 젖으니 내 마음도 울컥 젖어 왔다. 타지에서 도움 없이 시작하는 '생존'이라는 것이 마냥 힘들고 서글펐다. 거기에 비오는 오늘은 단 한 푼도 돈을 못 벌어 더욱 서글펐다. 비에 젖어 시체마냥 퍼런입술을 한채 오들오들 떠는 내 모습을 보고 걱정하실 어머니를 생각하니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스스로의 약속을 지켰다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래도 내 다짐은 내가 지켰다.' 생각하니 스스로가 막 자랑하고 싶을만큼 대견했다. 그럼에도 그런 다짐을 한 바로 다음날 폭풍을 선물해준 하늘이 괴씸하고, 비를 무심하게도 쏟아 내는 저 시커먼 하늘을 미웠다. 그래서 신이라도 있다면 나를 보라생각하고 하늘을 향해 하얗게 땡글 불고 또 쪼그라든 중지를 치켜세움과 동시에 수직으로 팔을 뻗어 날렸다. 


"18! 한장도 못팔아도 내가 내일도 나온다!" 

그렇게 나의 하찮은 생존이라는 도전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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