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단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우리는 오평 남짓한 공간에 모인다. 지상에서 입고 온 옷을 벗어 던지고, 베이지색 치마와 민트색 상의로 이루어진 유니폼을 입는다. 커피색 스타킹을 신고 긴 머리를 접어 머리망 안으로 구겨 넣는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꽃장식이 달린 모자를 쓴다. 검은 구두를 신고 레이스 장갑을 낀다. 우리는 어느새 엇비슷한 모습이 된다. 우리는 다시 계단을 타고 다시 위로 위로 올라간다. 통로에는 우리의 구두 굽 소리와 숨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 * *
일전에 찰리 채플린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이 문장은 언젠가부터 나를 맴돌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당황스러운 일에 휘말리거나, 슬픈 사건이 일어나 내가 그런 감정에 빠져있을 때면 곧 이 문장이 떠올랐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이 문장을 떠올리면 심각했던 내 일이 별일 아닌 것으로 느껴지고 이내 웃음이 나왔다. 내 스물셋의 칠월은 이 문장으로 가득해졌다. 그래서일까, 나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 발짝 물러나야 희극임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가까이서도 삶이 희극임을 느낀다. 어쩌면 애초부터 내 삶은 희극, 그 자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깨달음은 이 일을 시작하면서였다,라고 글을 시작한다면 극적이겠지만, 이것은 소설이 아니고 수필이기에 아쉬움을 느낀다. 이 글에서 나는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한 것의 반이라도 담을 수 있다면 좋겠다.
이것은 일을 시작하던 첫날부터 쓰고 싶었던 글이다. 어느새 일을 시작한지도 한 달이 흘렀다. 이미 많은 기억이 퇴색되어버렸다. 그래도 이는 내 스물셋 여름의 기억이다. 그것도 쉽게 잊고 싶지 않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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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에 대한 첫 느낌은,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끝없는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한 채 낯선이의 뒤를 따라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 통로에는 우리의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 날 나와 함께 들어온 아이들은 나까지 총 다섯이었다. 우리를 인도하던 여자는 계단을 내려가기 전 마주친 여자 무리에게 아이들을 잘 챙기라고 당부했다. 늘씬하고 기가 쎄보이던 여자들은 무슨 가스나들이 이렇게 많으냐고 말하며 웃었다. 그녀들은 우리와 함께 일할 여자들이었다. 왠지 기가 죽은 느낌이었다. 우리를 인도하던 여자는 의류실에서 옷이 없다며 화를 내며 거친 욕을 내뱉었다. 나를 포함한 아이들의 경직된 공기가 느껴졌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옷을 한 벌씩 건네받았다. 민트색 상의와 베이지색 치마, 벨트, 모자, 리본, 장갑. 우리는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을 건네받고 휴게실로 향했다. 지하 5층의 그 곳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사물함이 없다며 또다시 거친 욕을 내뱉는 여자 때문에 우리의 공기는 얼어붙었다. 그녀가 그 곳을 떠나자, 겨우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우리들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똑같은 유니폼에, 커피색스타킹을 신고,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머리망으로 머리를 구겨 넣고, 모자를 쓰자 우리의 모습은 엇비슷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입고 온 옷을 사물함에 넣고, 긴장된 마음으로 지시를 기다렸다. 다섯 명 중 세 명과 두 명으로 다른 파트로 배정되었다. 두 명은 곧 휴게실을 떠났다.
우리들의 선임인 그녀들 중 나는 키가 큰 언니에게 일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구두를 신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길고 긴 계단을 구두를 신고 오르려니 숨이 찼다. 평소에 구두를 잘 신지 않던 터라 구두를 계속 신고 있으니 괴롭기 그지없었다. 계단을 다 올랐나 했더니, 끝이 아니었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가니 다시 계단이 나왔다. 숨이 찼다. 돌고 도는 터라 어지러웠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 지상이 나왔다. 차들이 계속해서 밀려들어오고 있었고, 많은 차가 주차되어있었다. 햇빛이 강렬했다. 차 보닛에 햇빛이 비쳐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녀의 뒤를 따라 가며 나는 잔뜩 긴장했다. 부스에는 우리와 같은 옷을 입은 여자가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여자는 교대를 하고 떠났다. 내게 부스에 서보라 했다. 왼편에는 차들이 주차되어있고, 오른편에는 통로가, 그 오른편에는 관광버스들이 여러 대 주차되어있었다. 맨 오른쪽에는 호텔과 백화점 건물이 보였다. 나는 그렇게 주차장 안내도우미로 일을 시작했다.
한 시간 근무하고 한 시간 휴식. 하루에 5시간을 일하고 5시간을 쉰다. 그런 근무조건에 쉬는 시간까지 시급을 쳐주는 터라 꿀알바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한 시간이 무척 힘들고 지쳐 길게 느껴졌다. 그에 반해 휴식 한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첫 한 시간 동안 정신없이 여러 가지를 배웠다. 배웠다고 하기에는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간 곳은 백화점 직원식당이었다. 점심이 공짜란다. 오예. 저녁도 공짜란다. 오오예. 당연히 식비를 낼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열심히 일해야지, 하는 생각이 솟았다.
밥을 먹고 잠시 휴식한 뒤에 다시 근무에 투입되었다. 가끔 지하주차장을 갈 때 들었던 멘트들이나 보았던 행동들을 내가 해야 했다. 낯간지러웠지만 열심히 따라 하려 노력했다. 이전에도 몇 번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때마다 내가 가졌던 마음가짐은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나는 내가 아니라 그곳의 알바생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무조건 친절하게 하기, 무조건 웃기, 무조건 사과하기. 나의 마음가짐은 그러했다. 나는 나를 지우려 노력했다. 평소의 저음 대신 '솔'톤으로 안내 멘트를 했고, 사투리도 표준어도 아닌 말투로 멘트를 했다. 할수록 부끄러움이 사라져갔다.
5시간 동안 두 곳을 왔다 갔다 하며 일을 배웠다. 선임언니는 친절하게 잘 알려주었고, 가르쳐준 것을 다시 알려주고 알려주곤 했다. 어쩌면 내일부터 혼자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나는 겁을 먹었다.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근무가 끝나고 다시 휴게실로 내려왔다. 발이 퉁퉁 불어있었다. 며칠 전에 삔 내 발목이 걱정되었다. 새로 온 우리들은 모두 발통증과 피곤함을 호소했다. 결국 나중에는 긴 계단을 구두를 벗고 맨발로 걸어 내려왔다. 발이 찌릿찌릿했다. 힐을 만들어낸 누군가가 미워졌다.
길었던 첫 근무를 끝내고 퇴근을 했다. 벗어두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갔다. 호텔 로비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의 일개 직원이었던 내게 호텔 직원들이 친절한 미소를 보냈다. 나도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는 저런 얼굴이었을까? 정직원일 그들의 마음가짐과 파견업체의 아르바이트생인 나의 마음가짐은 많이 다를 것이다. 그것이 얼굴에 표시가 나지 않을까. 그들의 친절한 미소가 부러워졌다.
화려한 호텔을 빠져나오자 세상은 이미 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향하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옷이 제각각이었다. 똑같은 차림새의 지하 5층과는 다른 곳이었다. 나는 빠르게 걸어 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제야 다시 나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 조회 시간에 나는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내가 손을 들고 어지러워요,라고 하는 순간, 나는 비틀거렸다. 관리자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