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생활 멘붕 일지
직장생활 하다 보면 유난히 버겁고 힘든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멘탈이 흔들리고, 몸과 마음이 지치는 순간들이다.
이런 경험은 직급이나 경력과 무관하다. 직급 올라가고 연차가 쌓여도, 결국 직장인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외풍에 상처받곤 한다. 맷집과 내성이 조금 강해지기는 한다.
직장인들이 무조건 평안하고 안온한 하루를 바라는 건 아니다. 늘 역동적이고 변수 가득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어떤 변화가 나에게 닥쳐올 지는 모른다. 이런 상황이 직장인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니다. 변화는 오히려 호기심과 도전의식을 자극하기도 한다. 진짜 우리를 지치게 하는 건 사람과 조직의 문제다. 상사의 무례한 언행, 회사의 불공정한 인사, 리더십 부재, 조직문화의 문제 등.
회사 다니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몇몇 순간을 정리해 본다. 사직하고 이직했는데 또다시 사직서를 만지작거려야 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이직은 함부로 할 게 아니었다. 대기업 대리 고참 시절, 커리어 관리 문제로 회사를 옮겼다. 운 좋게 당시 잘 나가던 통신회사로, 그것도 과장으로 진급하면서 이직했다. 나도 만족했고 주변에서도 부러워했다.
하지만 첫날부터 낯선 공기 속에서 텃세와 견제를 느꼈다. 조직문화도 이전 직장과 너무 달랐다. 팀장은 역량이 부족한 데다 불공정하기까지 했다. 팀장의 첫 지시가 아직도 생생하다.
"해외법인 관리규정(안)을 월요일까지 만들어서 보고해 주세요."
금요일 오전에 떨어진 지시였다. 거의 불가능한 일정이었지만 첫인상은 중요하므로 주말 내내 작업했다. 군기 잡으려고 일부러 무리한 지시를 한 거라고 생각했다. 월요일 오전에 팀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주요 대기업 사례까지 비교 분석한 나름 완성도 높은 보고서였다.
팀장의 격려와 칭찬을 기대했던 나는 의외의 반응에 당황했다. 돌아온 건 "문서 양식이 틀렸다, 문장 간격이 잘못되었다"는 질책이었다. 내용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그때 느꼈다. 회사 생활 좀 험난하겠다는 걸.
다른 팀에 업무협조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쪽 과장과 미팅을 하면 이런저런 논리를 대면서 협력에 응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면 될 일이 풀리지 않았다. 결국 공채 출신인 초등학교 친구를 동원해서 그의 소개를 통해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공채라인은 끈끈했고 외부에서 들어온 경력자들은 인사상 불이익을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4년 후 다행히 제때 승진할 수 있었다. 조직에 스며드는데 3년이 걸렸고 마음고생도 심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하던 이사 시절, 벤처기업으로 옮기면서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조울증 상사를 만난 것이다. 생각지 못한 일은 잘도 일어난다.
처음엔 몰랐다. 그 상사는 합리적이고 스마트했다. 예의 바르고, 회사를 키우려는 의지가 강하고 아이디어도 많아서 호감이 갔다. 하지만 조울증이 문제였다. 조증이 심해지면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지시가 이어졌고, 상대방 의견을 무시했다. 내가 그 피해자가 되었다.
조증이 심해지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해진다. 주변 사람 말을 경청하지 않고 본인 생각이 다 옳다고 믿는다. 이런 심리 상태에서 이 일 해봐라, 저 일도 추진해 보라는 식으로 중구난방 지시가 떨어졌다. 조목조목 반대 이유를 설명하면 화부터 냈다. 반대하는 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다.
"이사님, A 사업을 추진하고 싶은데 사업계획 좀 짜주세요, 빨리."
"그 사업을 검토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데 알아보고 3일 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3일 후, "조사해 보니 그 사업하려면 초도투자자금이 최소 200억 원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단계에서 추진할 사업이 아닌 것 같아요."
당시 회사 잉여자금은 고사하고 재무구조가 안 좋은 상태였다. 더구나 A사업은 돈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전통적 사업이었다.
"언제 이사님더러 돈 걱정하라고 했습니까? 돈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사업계획만 준비하란 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속으로 '뭐지?, 내가 모르는 오너의 재력이?')
일주일 후 20p 분량의 사업계획서를 만들어서 상사에게 제출했다. 소요자금 규모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이러저러해서 약 300억 원이 필요합니다."
"아니 그 돈은 어떻게 준비할 겁니까? 이사님은 돈 생각도 안 하고 사업계획서 만드나요?"
그때의 황당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게 조울증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고는 화낼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부하직원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를 진짜 업무대화로 인식하고 어디서부터 무시할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이성적으로 이해한다고 내상을 입지 않는 건 아니다. 매일이 전쟁 같았다.
차츰 요령이 생겨서 비현실적인 지시에 대해서 바로 반대하지 않고 시간 끌기 신공으로 버티는 전략을 썼다. 그러다 보면 조증 상태가 가라앉거나 울증 상태로 넘어가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아이디어를 밀어붙이지 않았다. 조금씩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다시 조증 주기가 오면 상사는 과거 기억 속에 묻힌 신사업 카드를 다시 꺼내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조울증의 증상]
조울증(양극성 장애)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들뜨는 조증 상태와 기분이 극도로 가라앉는 우울증 상태가 번갈아 나타는 것이 특징. 조증일 때 증상은 다음과 같다. 비정상적으로 들뜨거나 과도한 자신감, 쉽게 짜증 내는 증상. 수면 욕구 감소(하루에 2~3시간만 자도 피곤하지 않음), 사고의 비약, 과도한 목표지향 활동, 무모한 투자, 과소비, 위험 감수 행동,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믿음, 주의 산만.
첫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당시 내 업무는 수출서류 네고(negotiation)였다. 해외에 상품 수출 후 수출했다는 제반 영문 선적서류, 신용장과 환어음을 준비하고, 이를 은행에 제시해서 수출 대금을 달러로 입금받는 것이다. 하루에 수백 장의 영문 서류를 검토해야 했다.
환율이 요동치거나 회사 자금이 부족할 때는 빨리 네고를 해서 달러를 입금시켜야 하기 때문에 바빠졌다. 영문 서류들이 책상 위에 산처럼 쌓였다. 과부하 속에 버벅대면서 일하던 어느 날, 꽤 큰 금액의 수출 건에 대한 선하증권(bill of lading) 원본을 분실하는 일이 발생했다. 책상 위 서류 더미를 다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원본은 3장 발행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1장도 못 찾았다. 부장은 그걸 잃어버리면 어떻게 네고를 하냐고 화를 냈고, 나는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후속 조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창피하고 황당했다. 서류 검토할 때 분명히 보았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행히 선배들이 이리저리 뛰면서 발 빠르게 처리해서 문제는 봉합되었지만 수치심이 남았다. 이 사건은 나중에 겪은 힘든 순간들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지만, 사회 초년생 입장에서는 기억에 남는 끔찍한 경험이었다.
직장 생활의 꽃은 승진이다. 누구나 빠른 승진을 꿈꾼다. 그런 만큼 진급에서 누락되면 상처가 크다. 상사와 조직이 나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다는 배신감도 든다. 더구나 나는 떨어졌는데 입사 동기가 제때 승진한 사실을 알게 되면 좌절감과 분한 마음이 솟구친다. 회사생활에 대한 의욕은 급격히 떨어진다.
사원~과장 시절엔 왜 그렇게 동기들과 승진 차이 1년을 가지고 예민하게 굴었는지....
진급 시즌만 되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경쟁심을 자극하는 회사 분위기도 한몫했다(반기마다 회사는 사원~대리급에서 부서별로 1명씩 선정해서 인사 가점 0.5점을 주었다. 이 점수는 승진에서 1년 차이를 벌릴 수 있는 점수였다). 진급 대상자에 속하는 첫 해에는 당연히 승진에서 미끄러질 수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2년씩 누락되는 선배나 동료도 있는데.
지금 돌아보면 젊은 시절의 1~2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10~20년 후에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도 1~2년 차이가 아니라 훨씬 큰 차이로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직장생활은 장거리 레이스다.
젊은 직장인이시라면 한 번의 승진 누락 때문에 너무 실망하시거나 힘 빼지 마시기를 바란다. 직장생활은 마라톤이다. 역전 기회는 언제든지 찾아온다.
지나고 보면, 유난히 힘들었던 순간도 결국 견딜만한 시간으로 느껴진다. 처음엔 많이 아프지만 점차 대응방안과 지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고통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