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의 말이 곧 사규
이직을 조급하게 서두르다 최악의 직장에 들어갔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글을 쓰는 게 오래된 트라우마를 호출하는 것 같아 불편하지만,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동결건조해두기로 했습니다.
40대 초반 무렵이었습니다. 대기업 다니다 번뜩이는(?) 사업 아이디어를 가지고 몇몇 선후배들과 함께 회사를 나와 벤처기업을 설립했습니다. 당시는 '밀레니엄 2000' 시절, 벤처 투자 붐을 타고 투자유치를 순조롭게 받으면서 상용화도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1~2년이 지나면서 시장 수요가 생각보다 작고 성장속도도 느리다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더구나 후발주자들이 새로 뛰어들면서 경쟁은 심해졌고, 회사는 추가 투자 없이 생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주이자 경영진이었으나 사업 방향을 두고 대주주와 갈등이 심해진 끝에 회사를 떠났습니다. 투자했던 자금 회수도 어려워지고, 저를 믿고 따라나선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던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헤드헌터를 통해 새 직장을 알아보았으나 벤처 거품이 꺼진 뒤였기에 취업은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40대 초중반, 고연봉 경력직은 새 자리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온라인 구인구직 사이트들에 열심히 이력서를 올리니 IT 업종이 아닌 타 업종 회사들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회사들이 많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보험 전문 영업직 제안이 가장 많았는데 업종이 맞지 않아 거절했던 기업이 납니다.
한 회사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의류업체였는데 면접 연락이 왔습니다. 본사를 찾아가니 직원이 나와서 대표이사실로 안내하더군요. 직원들이 근무하는 오피스를 가로질러 갔는데 공기가 무겁고 조용했습니다. '회사 분위기가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대표실로 들어갔습니다.
사장은 반갑게 맞아주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넓은 책상 위에 놓인 여러 대의 모니터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화면을 슬쩍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직원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게 뭐지?'
직원들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는 CCTV 화면이었습니다. 경찰서나 교도소의 관제실이 떠올랐습니다. 사장과의 대화를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나왔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허탈감이 밀려왔습니다. '저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어떤 마음일까?'
겉으로는 멀쩡한 회사였지만 공기 속엔 불신감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한 중견 제조업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코스닥 등록 업체였는데 경영관리이사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대표이사 면접을 보고 나서 일주일 후 출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내 역할에 대해 좀 더 깊게 의견을 교환하고, 그쪽 의중도 물어보고, 신중하게 판단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습니다.
6개월 정도 놀다 보니 초조한 마음이 생겼고, 아이들 교육비와 생활비 부담도 커지고 있었습니다. 업종은 달랐지만 제법 규모 있는 회사여서 안정적으로 관리이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출근 첫날부터 기대는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관리조직 직원들 표정이 밝지 못하고 말수도 적었습니다. 새로운 직속상사에게 이런저런 일들을 알려주고 질문도 할 만 한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저녁을 같이 먹자는 제안에도 무덤덤한 반응이었습니다.
'불길한 이 기운은 무엇일까?'
전임 관리이사의 업무흔적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서 철을 살펴보니 여러 명의 전임 관리이사들이 있었지만 죄다 1년을 못 넘기고 그만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여긴 뭔가 문제가 있구나.' 불길함은 일종의 확신이 되어 몸을 조여 왔습니다.
문제점은 곧 드러났습니다.
오너가 대표이사였는데 가족기업 문화가 강했습니다. 친동생이 부사장, 사촌동생이 비서실장을 맡는 등 조직 곳곳에 친척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대표는 직원을 믿지 않았습니다. 모든 의사결정은 그가 다 했습니다.
회사의 모든 결정을 대표이사가 직접 했습니다. 부장이나 이사급도 의사결정 권한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직원에게 문구류 업체를 하나 선정해 보자고 했을 때, 그리고 업무 상담을 위해 내가 아는 회계법인을 접촉했을 때 과장이 말했습니다. '저, 그러시면 안 되는데... 대표님과 먼저 상의해 보세요'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문구류 납품부터 부품 조달, 회계법인 접촉까지 모두 대표이사와 부사장의 친척이나 친구 업체와 하고 있었습니다.
회사에 제대로 된 사규집도 없었습니다.
"코스닥 등록은 어떻게 한 거지?"
대표이사는 숫자에 엄청 밝았고 머릿속에 수익을 내는 자기만의 방식이 확고하게 존재했습니다. 성공한 오너 맞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은 오래 근무할수록 삶에 찌들고 피곤함이 묻어났습니다.
생산과 영업조직에 이사가 1명씩 있었는데 그들과 좀 친해지고 회사 사정도 알아볼 겸 대화를 시도했지만 상투적인 인사 외에는 말을 섞지 않았습니다. 높은 담장이 느껴지더군요. 서늘했습니다. '입 닥치고 일이나 잘해', 뭐 이런 느낌.
두 달 정도 지나면서 저는 부서의 과장, 대리들과 조금씩 가까워졌습니다. 가끔 야근 후 함께 술도 마셨습니다. 한 번은 회식을 하면서 업무 프로세스를 바꾸어보자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날 대화는 바로 다음날 대표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 회사는 사람을 믿지 않는구나. 그리고 감시도 한다.'
협력사를 만나거나 직원들과 회식을 하면 감시의 눈초리가 따라다녔습니다. 북한의 5호 담당제도 아니고.
사무실 한편, 뒷자리에 젊은 여자 과장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비서인 줄 알았습니다.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지?' 궁금했습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대표님과 가까운 분이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과장이 전사 관리양식을 만들었다면서 사내에 돌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얼핏 보아도 어설프고 잘못된 양식이라서 제가 몇 마디 했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수정해서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취지로 조언했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봤습니다. 관리 과장이 다가와 저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왜 전임 관리이사들이 1년을 못 넘기고 다들 그만두었는지 수긍이 갔습니다. 저는 5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후련했지만 씁쓸했습니다.
오너는 관리이사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 그걸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원들에게 믿고 맡기면 훨씬 큰 회사를 이룰 수 있을 텐데 안타까왔습니다. 아니 회사가 더 커지는 걸 스스로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딱 그 정도 규모로 회사를 유지하면서 자신이 통제 가능한 선에서 이익을 챙기는 방식을 택한 걸 수도.
이런 회사에 직원의 성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뢰의 조직문화가 아니라 불신의 조직문화. 친척들끼리는 신뢰의 조직문화이기도 하네요.
하지만 정말 소중한 5개월이었습니다. TV 프로그램 '체험 삶의 현장' 같은 생생한 현장 경험을 했습니다. 중소기업 중엔 상식이 통하지 않는 회사가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후 회사를 고를 때 눈이 훨씬 밝아졌습니다.
요즘 30~40대들은 예전보다 훨씬 현명합니다.
이직을 결심해도 섣불리 사표를 던지지 않습니다. 이직을 최대한 준비하고 대안이 확실해지면 사표를 냅니다. 회사 다니면서 이직 준비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정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준비 없이 회사를 뛰쳐나오면 조급해집니다. 준비할 시간도 많고 올인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조급한 마음에 방향을 잘못 잡거나 섣부른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