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0km 급속행군

트라우마

by 업의여정

어젯밤, 잠을 설쳐 몸이 좀 무거웠지만 일어나자마자 동네에서 멀지 않은 관악산 자락 체육공원으로 향했다. 일일 8 천보 걷기. 평일 아침,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늘한 가을 공기를 느끼며 체육공원 주변 길을 걸었다.


관악산 위로 시리게 파란 하늘에 하얀 새 깃털 구름들이 살짝 떠 있었다. 차가운 공기는 청량했고, 걷다 보니 무거웠던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풀밭에 짙은 초록으로 군락을 이룬 클로버를 쳐다보며 군부대 쪽으로 걸었다. 산자락 아래 수도경비사령부 팻말이 보였다.


그때 갑자기 기억 저편에 있던, 귀에 익은 기상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저 소리는!’ 걸음을 멈췄다. 군 시절엔 괴롭던 그 소리가 꽤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부대 안에서 젊은이들이 괴로운 표정으로 이불을 밀쳐내고 있을 거란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다시 경쾌하게 걷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나팔 소리에 발맞춰, 하나, 둘, 하나, 둘….


100km 급속행군의 추억


나팔 소리는 갑자기 몇 십 년을 거슬러 100km 급속행군의 추억을 소환했다. 생생한 기억. 당시 나는 최전방 전초대대(수색매복과 GP근무 전문 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매년 가을, 대대에서는 소대 대항 100km 급속행군 시합을 했다. 잠을 자지 않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완전군장 하고 빠르게 걷는 행군이다. 급속행군은 극한의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소대원 단결을 요구했다. 30명이 잘 걸어도 1명이 낙오하면 그 소대는 꼴등이 된다. 낙오하는 병사를 격려하고, 군장을 들어주고, 부축해서라도 다 함께 완주해야 한다.


보통 24시간 내 100km를 주파하는데 소대별로 시간을 재서 1~3등 소대에는 두둑하게 상을 주었다. 돼지고기와 치킨이 있는 막걸리 회식은 기본이고,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단체 포상 휴가를 갈 수 있어서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날 12개 소대가 경쟁했던 것 같다. 당시엔 훈련을 자주 해서 30~40km 정도의 행군은 가볍게 해내었다. 하지만 완전군장 100km 급속 행군은 달랐다.


결전의 날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모든 소대가 연병장에 집합했다. 단상에 오른 육사 출신 대대장은 특유의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열정적으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대대장 훈시가 끝나고 군악대의 힘찬 행진곡에 맞추어 드디어 1소대부터 푸른색 소대 깃발을 펄럭이며 출정했다. 황금색 줄 장식이 있는 빨간 제복의 사단 군악대까지 동원되었다. 대대장과 주임상사, 중대장들은 대대 정문 앞에 양 쪽으로 도열하여 힘차게 박수 쳐주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 아마 이런 걸 거야.'


소대별로 10분 간격으로 출발. 드디어 우리 소대도 출발했다. 전날 분대장들과 지도 보면서 행군코스를 확인하고 전략을 세웠다. 구간 별로 누가 앞에 서고 누가 맨 뒤에 설 것인지, 낙오자가 나오면 어떻게 지원하고, 야간 행군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 꼭 1등 해서 포상 휴가 가자고 결의를 다졌다.


30kg 완전군장을 한 상태에서 55분 걷고 5분 쉬는 사이클이 시작되었다. 24시간 내 100km를 주파하려면 시간당 5km의 속도로 잠 안 자고 계속 걸어야 한다. 처음에는 길가 경치가 눈에 들어오고 상쾌하게 출발하지만, 걸을수록 시야가 좁아진다. 나중엔 앞사람의 등짝만 쳐다보며 걷는다. 밤에는 주변이 온통 깜깜해서 졸거나 정신줄 놓으면 경사로로 미끄러지거나 장애물에 걸려 다칠 수 있다.


행군 초반에는 군장 무게로 인해 어깨가 아프고, 중반에는 땀에 젖은 옷에 사타구니가 쓸려 통증이 심해진다. 후반부엔 아픔을 거의 못 느끼는 무아지경 상태가 된다. 50km가 넘어가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한다.


4.png


지름길을 선택하다


소대원을 독려하며 50km 지점까지 순조롭게 가고 있었다. 낙오자 한 명 없이 묵묵히 전진했고, 우리 소대는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2개 소대를 앞질렀다. 저녁 8시가 넘어가면서 어둠이 짙게 깔렸다. 그믐. 논둑길에서 휴식을 취하며 지도를 보다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조금 더 가면 행군코스를 잘라먹는 지름길이 있었다. 우리 뒤에 오는 소대와의 거리를 충분히 벌린 후에 어둠을 이용해서 잠깐 지름길을 타면 6~7km 정도 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


게임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지만 걸리지 않고 이기는 것도 능력이라고 스스로 설득했다. '지금은 전쟁 상황이야. 전장에서는 규칙보다 임기응변이 더 중요하지.'라고. 나는 대열의 앞 뒤에 흩어져 있던 4명의 분대장들을 불러 모았다. 지름길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주었고 분대장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55km 지점에서 우리 소대는 과감하게 지름길로 들어섰고, 선두는 행군 속도를 올렸다.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빨리 지름길을 벗어나서 본 코스에 합류하면 끝이었다. 이제 1km만 더 가면 되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밝힌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치욕 그리고 꼴등


저거, 저거 뭐지? 가슴이 덜컹했다. 야밤에 이 산길에 들어 올 민간인 차량은 없었기 때문이다. 차가 점점 다가오는데 자세히 보니 대대장 지프차였다. 아뿔싸! 조금 전만 해도 대대장은 본부에서 무전으로 상황보고 받고 있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대대장과 중대장이 새벽에 각 소대 이동 상황을 점검하러 나온 것이었다. 1개 소대가 안 보이자 지름길로 들어온 것 같았다.


대대장 지프차는 먼지를 일으키며 급하게 내 앞에 멈춰 섰다. 대대장님은 작전참모와 함께 지프차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호되게 욕먹을 각오를 하고는 경례하고 사실대로 보고했다. ‘죄송합니다.’라는 내 말을 듣고도 대대장은 화내지 않았다.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지시했다. “당장 원래 지름길이 시작하던 위치로 돌아가서 행군한다, 실시!”, ‘예, 알겠습니다’ 크게 복창하고 소대원들을 뒤로 돌렸다. 지프차는 휑하니 먼지를 일으키며 가버렸다.


전 소대원이 후진을 해야 했다. 앞이 깜깜했다. 소대원들 사기가 급격히 땅에 떨어졌다. 100km가 아니고 이제 110km 넘게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탈진하는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 탓이었다. 분대장과 소대원에게 미안하고 창피했다. 하지만 자책할 겨를도 없었다. 낙오하는 병사들을 끝까지 독려하고 행군 대열 앞 뒤를 왔다 갔다 동분서주했다. 미안하니까 더 뻔뻔하게.


마지막 10km 구간은 잘 아는 코스였지만 끝도 없이 길게 느껴졌다. 소대는 26시간이 지나서 탈진 상태로 부대 정문에 도착했다. 어제 아침밥 먹고 출발했는데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복귀했다. 우리가 정문에 도착했을 때 군악대는커녕 반가이 맞아주는 장병 한 명 없었다. 1등을 거머쥔 소대는 거의 22시간 만에 군악대 연주에 맞추어 정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대단한 기록이었다. 삼겹살과 막걸리 파티는 이미 끝나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2.png


발바닥 물집과 마음의 물집


가을밤의 신박한 도전은 한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욕심부리다 낭패를 본 순간이었다. 우리 소대는 112km 급속행군을 완주한 대한민국 최초의 소대였는지도 모르겠다. 소대원들은 막사에 도착하자마자 말없이 군장을 풀었다. 졸음이 쏟아지고 말할 힘도 없었다. 나는 완주한 소대원들을 뻘쭘하게 쳐다보면서 뭐라도 멘트를 해야 했다. '정말 수고 많았다. 1등은 못했지만 낙오자 없이 완주했으니 됐어. 잘했어. 우리 소대만 따로 멋지게 회식하자.'


잠이 쏟아졌지만 샤워하고 점심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휴식 취하기 전에 발바닥 여기저기 생긴 물집에 응급처치를 해야 했다. 실을 꿴 가는 바늘을 불에 달군 후 물집 중앙부로 능숙하게 관통시켜 실이 물집을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물집 양 쪽으로 적당한 길이로 실을 늘어뜨린 후 양 끝을 자른다. 요오드팅크(빨간 소독액)를 터진 물집 주변과 실에 흥건하게 바른다. 그러면 소독액이 실을 타고 물집 속에 스며든다. 상처가 곪지 않고 빨리 아문다.


발바닥에 국방색 실이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은 가관이었다. 내 마음에도 여기저기 쓰라린 물집이 잡혔다. 3일 정도 절뚝거리고 다니다 발바닥은 아물었고, 마음의 상처는 한 달 정도 후 치유되었다. 소대원들은 고맙게도 나에게 일절 불만을 표하거나 단체 포상휴가 못 갔다고 원망하지 않았다. 분대장과 병장들이 담합하여 주의를 환기시킨 모양이었다.


제대하고 한참을 지나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 사건은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다. 소대원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하고 제대한 것도 마음 한 편에 아쉬움으로 남았다.


트라우마


쓰라린 행군의 추억은 체육공원 둘레 길을 두 바퀴 돌고 나서 끝났다. 발바닥이 근질거렸다. 회사로 출발하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제 내 인생에 편법은 없다. 55분 걷고 5분 쉰다.

거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견고함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임기응변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일까? 미소가 번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