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결국 자기만의 몫이 정해져 있다.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엄마의 조촐한 칠순 행사들이 다 마무리되고 아빠의 우울증이 다시 발현됐다. 작년에 두 번 했으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영화 명대사 중 “아직 한발 남았다”처럼 진짜 마지막 한방을 우리에게 보란 듯이 날렸다.
두 번의 단식 덕분에 단련이 되었는지 이젠 눈물도 안 났다. 그리고 만약 이 사태를 못 이겨내면 아빠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부터 차근히 생각했다. 예전처럼 아빠에게 먹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통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우선 혈당과 혈압을 체크하고 굶기 시작한 날을 달력에 동그라미 치면서 전쟁의 서막이 시작됐다. 엄마는 걱정에 쪼그라들어갔지만 난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평소와 같이 생활했다. 아빠를 모시고 재활을 가고 선생님들에게 아빠가 또 단식 중이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해드렸다. 그리고 3~4일에 한 번씩 재활을 안 가는 날 휠체어에 억지로 태운 후 수액을 맞췄다.(아, 참고로 대학병원의 가정의학과 외래 주사실에서는 며칠씩 굶은 고령자에게 동네 내과보다 수액을 2배 정도 천천히 넣어주니 여유 있게 준비하고 가는 게 좋다.)
처음에는 안 맞겠다고 몸부림치시다 기운이 없으니 수액을 맞으시며 쿨쿨 주무신다. 그러다 수액이 50ml 이하로 남으면 귀신같이 일어나 다시 주사를 뽑아달라고 맥없이 소리를 지르신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고 입술이 허옇게 떠버린 아빠를 침대에 눕혀드린다. 영양제로만 버티니 기운이 고갈된 아빠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밤잠을 주무신다. 또 다시 스스로 생의 불을 꺼버리고 싶을 만큼 그에게 고통스러운 게 무엇인지 정확히 헤아릴 수 없기에 잠든 아빠의 혈압과 혈당을 확인하며 지옥 같은 밤을 지새운다.
이걸 반복하는 와중에 재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건 이젠 불문율이 되었다. 집에 가면 바닥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푹 꺼진 눈으로 울고만 있는 사람을 어떻게 집에만 두겠는가? 잘하지 못하는 운전이지만 서울 외곽을 정처 없이 떠돌며 그저 아빠가 이 계절을, 풍경을 느끼며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 주는 수밖에. 그걸로도 안될 것 같으면 400km 가까이 떨어진 아빠의 고향까지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미친 짓도 해본다.(그러고 보니 그 날, 정읍까지 올라왔을때 해가 지고 있었는데 산에 걸린 노을을 보며 엄청 행복하게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면 나의 육체 및 정신적 체력도 반정도밖에 남지 않아 악으로 깡으로 버티기에 돌입한다.
단식의 9부 능선을 넘었을 때쯤 봄은 우리의 상황과 다르게 찬란하게 만개했다. 그 날은 유독 미세먼지 없이 너무나 화창했고 녹음은 정말 푸르렀다. 공교롭게도 재활일정이 없는 날이었고 그렇다면 안 나갈 이유가 없었다.
수액의 기운으로 버티고 있는 아빠를 또 차에 태웠다. (이쯤 되면 고문관이라고 불려도 부정할 수 없다.) 기운이 없어도 너무 없으니 멀리는 갈 수 없어서 가장 가까운 서울 대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다짐도 했다. 코끼리 열차도 태워드리기로! (늙으면 애된다고 하고, 애기들은 코끼리 열차를 좋아하니 어느 정도 나쁘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차를 하고 동물원 방향으로 휠체어를 열심히 밀었다. 중간에 카페에서 빵도 사고 음료수도 사면서 절망 속에서도 피크닉 분위기를 쫌 내봤다. 사실 아빠를 유혹해 보려고 산 이유가 제일 크다. 이러다 먹으면 정말 감사한 일이니까. 동물원에 들어가 최대한 제일 안쪽까지 구석구석 보며 한 바퀴 크게 돌았다. 덕분에 나도 엄마도 오랜만에 동물원을 샅샅이 본 것 같다.
동물원에서 나오기 전에 제일 볕이 잘 드는 벤치에 앉아 샀던 빵과 음료수를 펼치고 먹었다. 선견지명이 있는 엄마가 비장의 무기로 챙겨 온 잘 익은 바나나도 야무지게 하나 먹어봤다. 아빠는 그래도 집에 가고 싶은지 우리를 등진채 휠체어를 움직여 최대한 그늘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사방이 다 트이고, 한낮이라 그늘진 곳을 주변에서 찾기란 힘들었다. 그렇게 체념하시고 등과 정수리로 봄의 햇살을 한참 받으셨다. 우울증 환자가 해를 보면 효과가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 휠체어를 앞으로 끌고 와 내가 먹던 바나나를 말없이 건네어드렸더니 그걸 천천히 다 드셨다! 열흘 넘게 새까맣게 타던 속이 탄 냄비 콜라로 지워내듯 깨끗하게 씻겨 내려갔다.
다 드신 후에는 내 자몽에이드를 가져가 반을 드시는 게 아닌가? 최대한 기쁜 척도 안 하고, 더 드시라고 권유도 하지 않았다. 급한불은 껐으니 자연스럽게 빵도 한입 먹어봤다. 그랬더니 이제 빵봉지를 뒤적거려다 치아바타 한 조각을 가져가셔서 야무지게 드셨다. 우린 속으로 안도하고 먹을 만큼 먹었으니 가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진 제목 : 단식12일차. 이걸 다 먹어? 말아?>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코스. 코.끼.리.열.차!
사전에 한겨울 빼고 휠체어리프트를 이용해 휠체어도 태워준다는 걸 확인했겠다,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었다. 안내요원에게 오늘도 가능한지 확인하고 표를 구매한 뒤 줄을 섰다. 참 여러 가지 마음이 복잡하게 들었다. 아빠를 태울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들떴고, 내가 어릴 적 셋이 타던 추억의 코끼리 열차를 이젠 이런 방식으로 타게 된다는 게 굉장히 묘했던 것 같다.
직원이 무전기로 휠체어가 탈 수 있는 코끼리 열차를 배차했고 일반열차를 두대정도 보내니 아빠가 탈 수 있는 열차가 들어왔다. 아빠는 맨 앞자리에 봄바람을 한가득 맞으며 대공원의 봄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2주 가까이 굶은 사람이라고 생각도 못할 만큼 초롱초롱한 눈이었다. 내가 담아주려고 했던 (어쩌면 마지막이었을지 모르는) 봄이 아빠에게 온전히 담기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들어간 것 같았다. 봄을 강제 주입당한 아빠는 집으로 돌아와 피곤한 몸을 누이고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나 다시 삶에 발을 붙였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이미 아빠의 마지막 단식 후 8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중간중간 또 식사를 그만두시지 않을까 엄마와 전전긍긍했다. 다행히도 그 이후 아빠의 마음과 머릿속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단식은 안 하시고 예전보다 인지력도 뚜렷해지시고 생기 넘치게 이것저것 맛있게 드시며 지내고 있다. (별명도 생겼다. “빵돌이”라고…)
결국 사람은 어떤 고난과 역경이 덮쳐도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난 몫만큼은 살아낸다는 게 반년의 시간 동안 세 번의 이벤트(?)를 겪으며 얻은 나의 작은 진리다. 또 그저 옆에 있는 사람은 안달복달하지 말고 왜 그러냐고 다그치지 말고 그저 묵묵히 최선을 다해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뿐이라는 것도 이번에 깨달은 사실이다.
다들 우리에게 오는 모든 계절을 차분히 느껴보세요. 분명 스스로 닫아둔 작은 문을 열 수 있을지 몰라요!
살기 싫어졌습니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