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싫어졌습니다 2

한 번이면 좋았을 것을

by 르아미



.




우리 집 재활의 문제라 하면 환자의 기분과는 상관없는 스파르타식이라는 것이다.

탄력을 받았다는 게 느껴지면 보더콜리가 양 떼들을 몰듯 그렇게 운동을 시킨다. 뭐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게 운동이라고요? 하겠지만 아빠와 나의 기준에는 이 정도면 꽤 대단한 운동이다. (엄마가 들으면 그 딴것도 운동이냐고 반문하겠다만.. 우리 기준에는 그렇다.)


1차 단식이 끝나고 한 달 정도가 됐을까? 재활을 끝내고 집 앞에 도착하면 난간이 있는 부분부터 올라가는 연습을 했다. 여름도 다 지나겠다, 병원에서도 그 쯤부터 평행봉을 졸업하고 매주 목요일이면 낮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연습도 하는 중이었고, 운동을 시키는 사람들도 운동을 당하는(이런 문법은 없지만 아빠는 운동을 스스로 하는 게 아니고 강제집행 당하는 수준이라 이런 표현이 적절하다.) 사람도 쾌적한 환경이라고 생각하고 지체 없이 시작한 것이었다. 첫날부터 우리의 도움으로 한 칸씩 잘 올라가셨다. 올라가면서 허파에 구멍 난 사람처럼 웃긴 했는데 그게 또 무언의 사인이라는 건 꿈에도 몰랐다.


2회 차마다 반층씩 증가시키면서 운동한 지 2주 정도 됐을까? 수요일 아침 재활을 가려고 아빠를 깨웠더니 짜증을 내면서 침대와 한 몸이 되셨다. 날이 좀 추워져서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 보다 하고 병원을 안 가기로 했다. 전화로 언어치료 선생님께 이래저래 해서 못 간다고 말씀을 드리고 아빠를 한두 시간 정도 더 주무시게 뒀다. 약을 드시려면 식사를 하셔야 하니 깨워서 소파에 앉혀드렸더니 그때부터 식사를 안 하시기 시작했다.


또 2차 단식 디톡스의 서막이 올랐다.


이번에도 죽겠다는 사람과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사람들과의 팽팽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셋이서 대성통곡 파티를 열였지만 우는 건 우는 거고 먹이는 건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풍화되는 멘탈을 긁어모아 다른 계획을 세웠다.

평소에는 급할 때 빼고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해 오가는 병원이지만 단식 기간 동안은 내 차로 이동했다. 식사를 안 하니 휠체어에 탄 채로 왕복 두 시간씩 움직이는 건 컨디션에 무리가 갈 것 같았고, 이번에는 안 드시면 귀가는 없다!라고 생각했기에 아직 능숙한 운전은 아니지만 차를 쓰기로 했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재활도 제대로 못 받고 시간도, 돈도 날리고 올 지언정 억지로라도 선생님들을 만나게 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끔 만들었다. 작업치료, 운동치료, 언어치료, 외래 간호데스크까지 다 들려서 살기 위한 잔소리를 종류별로 듣고 오면 아빠의 생각도 달라질 거라고 믿어봤다.

먹은 게 없어서 흐물거리는 아빠를 모시고 각 치료실마다 들어가면 인사와 동시에 저번 시간에 왜 안 왔는지 질문이 먼저였는데 아빠는 그저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나는 내 입으로 아빠가 살기 싫어졌다는 말을 꺼내며 운전하는 동안 꾸역꾸역 참아왔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선생님들에게는 종종 있는 일인지 그래도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면서 강도 낮은 재활을 시켜주셨다. 그리고 끝나는 인사를 할 때는 다음 시간에도 운동하게 꼭 오라는 확답도 받으셨다. 그 순간은 그 말 한마디가 엄청난 위로가 된다. 선생님들이 아빠를 포기하지 않는 것 같아서 더 위로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재활 순회공연이 끝나고 차에 타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내 차로 움직이는 또 다른 목적은 억지로 끌려온 재활이 아주 소프트한 일정이었다는 걸 느낄 수 있게 해 드리는 게 첫 번째, 두 번째는 뭐라도 드시게 하고 귀가하는 것이었다. 이제 두 번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의 시간은 2004년으로 돌아간다.


“나랑 밥 먹을래?! 나랑 같이 죽을래?! “


추억의 드라마 <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소지섭 대사가 왜 여기서 나오냐고 물어보신다면 정말 그 대사의 반을 차용한 내 대사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나랑 밥 먹을 거야?! 안 먹으면 집에 못 가!!”


2주 동안 재활하고 차에만 타면 한 말이었다. 회유는 치료실에서 협박은 차에서 이뤄지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내차로 이동한 거였으니까.

가방에는 항상 영양음료와 작은 물 한 병을 챙겨서 밥이 싫다면 이거라도 먹자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이야기했지만 거의 돌에게 물먹으라는 상황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기운이 없어서 눕고 싶은 마음에 억지로 권하는, 고작 두유 한팩보다 작은 영양음료를 간간히 드시긴 하셨다. 근데 그게 하루 영양의 전부였다는 것이 더 애간장 녹이는 일이었다.

단식 기간 중 하루는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고 병원이 끝나자마자 아빠에게 똑같은 대사를 하고 겨우 물을 반 병드시게 하고 하남에 있는 대형 쇼핑몰로 차를 몰았다. 도착해서 뜨끈한 설렁탕에 밥을 말아서 이걸 드시면 진짜 집에 간다고 했지만 마치 나를 낚시하듯 먹는 척하면서 한 숟가락도 드시지 않고 쇼핑몰을 나왔다. 이대로 집에 갈 수는 없기에 팔당댐 전망대로 핸들을 틀었다. 전망대 앞에 차를 세우고 2차전이 시작됐다. 물을 먹자 아니면 영양음료를 먹자- 하면서 옥신각신을 했지만 끝까지 아무것도 안 드신 아빠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광명 대형 쇼핑몰로 끌려갔다. (진짜 운전하는 나나 빈속으로 끌려다니는 아빠나 쌍방 고생 신나게 했다.) 쇼핑몰을 한 바퀴 돌고 차로 돌아와 3차 옥신각신 끝에 영양음료 한팩을 다 드시고 노을에 얼굴을 구우며 집으로 돌아왔다.

동쪽에서 서쪽까지 차로 이동하는 내내 아빠는 한숨도 주무시지 않고 창밖 풍경을 열심히 구경했다. 오히려 컨디션이 더 좋아 보였다. 기운이 없을 텐데 초롱초롱한 눈으로 모든 길을 눈에 담는 것 같았다.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기운은 남아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내가 부지런하지 못해서, 힘들고 날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아빠를 너무 집에 가둬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서 코끝이 시큰했다. 옛말에 부모는 열 자식을 키워도 자식은 부모하나도 제대로 못 모신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딱 맞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도 한편에 들었다.


무작정 아빠가 굶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었기에 재활을 안 가는 날은 동네 내과에서 영양제를 억지로 맞췄는데 그건 그것대로 신기한 일이었다. 보통 안 먹고 죽겠다는 환자는 영양제마저 절대적으로 거부하지만 아빠는 처음만 거부할 뿐 바늘만 꽂으면 그냥 놔뒀다. 이런 행동만 보면 진짜 이승을 털고 가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단지 자괴감과 절망감으로 온 우울감이 아빠를 덮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빠의 판단력이 일시적으로 흐려져 이런 고집을 피울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지 진짜 자신의 마음은 오히려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식사를 안 하신 지 열흘정도 되니 지겨운 강제 드라이브 효과였을까? 재활 후 자연스럽게 먹는 환경에 노출시키기 위해 간 서울 근교 카페에서 권하지 않았지만 본인 스스로 내 음료수도 뺏어드시고 집에 가서 자연스럽게 과일을 건네고 자리를 뜨면 반정도는 거뜬히 시작했다. 반정도 비어있는 그릇을 보고 내가 고양이랑 살고 있나 착각이 들었지만 다시 식사를 시작할 명분이 없으니 그런 식으로 조심스레 드시는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봤다.


2차 단식을 시작한 지 딱 2주 만에 식사 비슷 한 것을 시작하셨다. 그날 다이어리를 보니 하루동안 영양음료 1팩, 카스텔라 반쪽, 사과 반쪽, 김에 밥 싸서 반공기, 만두 3개, 애플망고 반쪽, 물 500미리를 드셨다고 쓰여있다. (이번에는 얼마나 안 드시나 싶어서 다이어리에 다 메모해 뒀다.) 당뇨가 있지만 우선 먹는 게 중요하니 권해서 드시면 먹고 싶은 만큼 드시라고 놔뒀는데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조금씩 더 잘 드시기 시작해서 4일 차부터는 정상적인 식사로 다시 돌아왔다.


진짜 지독한 2주였다.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될 일이고, 정말 뼈에 아로새길 정도 괴로운 일이었다. 너무 힘들었던 이 과정에서 우린 또 무언갈 얻었겠지만 고통 대비 너무 소소한 것 같아 가성비 최악의 사건으로 우리 가족의 일생에서 영원히 회자될 것 같다.




아빠. 이제 남은 생은 그냥 잘 먹자!









작가의 이전글살기 싫어졌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