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에는 콜럼버스가 이름 붙여둔 섬이 정말 많지만, 불행히도 모든 섬이 납득할 수 있는 이름을 받아든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섬의 모양이 '뚱뚱한 여성이 누운 모습'을 닮았다 하여 Virgin Gorda라 명명했거나, 일요일에 발견했다 하여 Dominica라 명명한 식이다. 하긴, 이 사례들처럼 특이하지는 않더라도, 많은 섬들에 그때 그때 떠오르는 카톨릭 성인들의 이름을 붙여 두었으니 이 또한 성의 있는 작명은 아닐지도.
Nevis 섬의 경우에도 콜럼버스의 '특이한 사고 방식' 때문에 요상한 이름을 받게 된 케이스. 콜럼버스가 이 섬에 도착해 보니 산 정상에 구름이 서려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산에 구름이 껴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이 마치 눈 내린 산과 비슷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눈의 성모' (스페인어로 Nuestra Señora de las Nieves) 를 모티브로 이름을 붙여버린 것이다 (그나마도 원래 단어인 Nieves가 아니라, 이를 변형한 Nevis로 붙여 버렸다). 그래서 열대 기후인 카리브해 한복판에 '눈'을 뜻하는 섬이 생겨버린 것.
하지만 기왕 붙여진 이름을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또 의외로 분위기가 이름에 걸맞는 면이 있다. 세인트 키츠 자체도 엄청 번화한 곳은 아니지만, 세인트 키츠에 머물다 네비스로 넘어오면 갑자기 훨씬 한가하고 여유로운 느낌이 들게 된다. 분명 더운 날씨는 맞는데, 세인트 키츠보다는 훨씬 chill한 느낌이 든다는 의미 (물론 흥까지 식혀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거 플랜테이션이 번성하던 시절에는 훨씬 북적거렸겠지만, 지금은 무심하게 들어와 풍요로운 자연과 문화를 즐기면서 여유를 되찾기에 딱인, 그런 편안한 곳이 되었다.
Nevis Peak의 모습. 이 섬 자체가 이 화산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 이 섬 어디에서든 이 산이 보인다.
Cottle Church. 과거 영국 성공회 교회였으나, 인구 감소로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과거 노예 노동력 기반 플랜테이션 성업기에는 인구가 훨씬 많았다 한다).
그래서일까, 이 섬의 곳곳에 이러한 유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인구 13,000명 정도의 한적한 섬이 되었다.
이 한적한 기분은 동물에게서도 느껴진다. 한가하게 풀을 뜯는 소에게서도...
... 자기들끼리 쉬고 있는 나귀에게서도...
... 그리고 굳이 나무에 올라가지도않고 쉬고 있는 원숭이에게서도 한가로움이 물씬 풍긴다.
New River Estate에 도착. 비록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유적만 봐도 과거 이곳이 꽤나 큰 규모의 플랜테이션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여기에서 증기를 생산해 각종 설비를 돌렸으리라.
실제로 많은 플랜테이션들이 초반에는 바람이나 물의 힘을 활용했으나, 산업혁명 이후 증기의 힘으로 사탕수수 압착 등 각종 작업을 수행했다 한다.
Nevis Peak 산 중턱의 Golden Rock Inn. 숲속 아늑한 느낌이 좋다. 옛 플랜테이션을 개조해 호텔로 사용 중이며, 기존 시설을 최대한 잘 활용한 점이 인상깊다.
예를 들어, 과거 창고로 사용되던 건물을 이렇게 멋진 바로 탈바꿈시켰다.
테이블에 앉아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있으면 마치 숲속에서 피크닉을 하는 기분이 들 듯.
이번에는 Hermitage Nevis. 산 중턱이긴 해도 조금 더 내려온 위치이다 보니 숲보다는 잘 가꾸어진 정원 느낌이 든다.
과거 대지주의 저택이었던 모양. 이를 최대한 잘 살려, 투숙객들도 당시 이들의 럭셔리한 삶을 느껴볼 수 있게 해두었다.
같은 음식이라도 이런 곳에서 먹으면 더 멋있어 보일 것만 같다.
Montpelier Plantation (이런 곳들을 연달아 보여주는 것을 보면 택시 기사가 고급 호텔 취향이었던 듯). 이곳은 조금 더 아래쪽이라 그런지 경치도 더 시원하다.
옛 풍차를 개조해 프라이빗 다이닝 공간으로 꾸며 두었다. 꽤나 창의적이지 않은가.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식당에도 옛 기계 부품을 걸어두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곳을 디자인한 사람의 미적 감각이 부럽다.
산 중턱에서 다시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 가리는 것 없는 시원한 바다 전망에 홀린듯 연신 사진을 찍게 된다.
이 섬의 중심 Charlestown 근처 Nevis Hot Springs. 언뜻 보면 치수 공사를 마친 갈수기 하천 같아 보이지만, 사실 여기 흐르고 있는 물은 온천수이다.
그래서 군데 군데 이렇게 온천욕을 즐길 수 있게 풀을 만들어 두었다. 옛날부터 꽤나 효능 좋은 온천이라 소문이 자자했다 하니, 기왕 이 섬에 왔다면 한번쯤 발이라도 담가보자.
이렇게 짧게나마 섬 일주 투어를 마치고, Four Seasons Resort Nevis에 도착.
그런데 해변의 모래 색깔이 생각보다 검다. 이 섬이 화산섬이라 해변도 화산암 기반 검은 모래가 많기 때문. 새하얀 모래 해변을 기대했다면 살짝 실망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새하얀 모래 해변 대신 Nevis Peak를 배경으로 한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비록 숙박 없이 간단한 요기만 하러 왔지만, 한번씩 생각날 것 같은 경치이다.
고급 리조트 방문 시 웰컴 드링크를 주는 경우는 많이 봤어도, 웰컴 무지개 (?) 를 주는 경우는 처음 본다.
무지개로 산뜻해진 기분을 즐기며 비치바로 향한다. 분위기도 좋고, 직원도 친절한 것이 역시 이곳에 잘 들렀구나 싶다.
그렇다면 느긋한 마음으로 목부터 축여보자. 투숙객은 아니지만, 이 순간 마음만큼은 이 리조트 오너.
그리고 이내 주문한 conch fritter도 받아든다. 그리고 이내 자리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그냥 여기에서 저녁까지 먹고 갈까...
역시 여행 중에는 때때로 충동에 순응하는 것이 좋겠지. 눌러 앉기로 결정하고 칵테일도 한 잔 더 주문한다.
그 사이 해가 지기 시작하고, 비치바도 슬슬 조명을 밝힌다.
저녁 메뉴는 버거와 시저 샐러드로 결정. 분위기가 이미 조미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음식 자체도 내공이 충만하다.
결국 이렇게 밤까지 노닥거리게 되었다. 투숙객이었다면 수영장도 잘 써먹었겠지만 이번에는 패스.
다음날 아침, 세인트 키츠행 페리를 타기 위해 Charlestown으로 이동한다. 이곳도 꽤나 유서 깊은 마을인데, 미국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해밀턴이 이곳 출신.
고속 페리는 아니지만, 한 시간 정도면 수도 Basseterre에 내려주니 충분히 만족. 당시에는 페리 뿐이었지만, 이제는 (2025년 11월 기준) 항공편도 다시 취항하니 참고
Nevis Peak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감상하며 페리는 떠나간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의 평화를 얻고 가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