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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Jan 30. 2023

# 29. 면접교섭권은 어른이 아닌 아이들의 권리입니다

힘든 고비들을 참 많이 넘고 넘으며 그렇게 부부가 되었던 우리는 고작 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아주 간결한 질문과 답변으로 너무도 쉽게 남이 된다.


판사의 이혼 확정판결을 듣기 위해 대기실에 모인 이혼을 앞둔 부부들의 모습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이곳까지 와서 미친 듯이 서로의 잘못을 추궁하며 싸워대는 부부,

곧 이혼할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부부,

그리고 나와 내 남편처럼 꿈에서도 본 적 없는 사람인 양 냉정한 타인이 되어 서로를 본체만체하는 그런 부부까지.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어쩌면 두려운 마음으로

나는 가만히 앉아 내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 안제나 님 들어오세요


실무관의 부름에 나와 남편은 엉거주춤 일어나 판사가 있는 방으로 향한다.


나는 처음,

그는 두 번째,

그럼에도 이 순간, 이 자리는 서로에게 몹시도 불편하다.


판사는 곧 이혼할 부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작성해서 제출한 협의이혼 신청서를 살펴보며 재빠르게 확인사살을 할 뿐이다.


- 안제나 님, 그리고 남편님.

협의이혼하시기로 하셨고, 재산분할, 위자료는 따로 없으시고, 아이는 아빠가 키우기로 하셨고, 양육비도 아빠가 부담하시기로 하셨네요.

면접은 매월 첫째 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 역에서 진행합니다.

맞나요?


그저 담담히 판사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아이의 이름이 귓가에 들리우는 순간, 또 한 번 서럽게 눈물을 토해낸다.


어쩔 수가 없다.

아이는 나에게 너무 무거운 십자가이며,

나는 내 아이에게 평생 갚지 못할 죄를 짓고야 말았다. 내 아들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냉정하지 못한 비겁한 엄마는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대답을 못하고 눈물만 쏟는 나에게

어쩌면 당신도 누군가의 엄마일지 모르는 여판사는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한번 나에게 되묻는다.


- 협의하신 내용 맞나요?


남편은 혹시라도 대답을 안 해 일이 틀어질까 두려웠는지 방 밖의 사람들이 모두 들을 만큼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 네!


뒤를 이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가 대답했다.


- 네...


너무나 간결한 헤어짐이다.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곁에 서 있던 실무관은 우리에게 A4 사이즈의 종이 쪼가리 한 장씩을 쥐여준다.


- 두 분 중 한 분이 관할 구청에 신고하시면 이혼 성립되십니다. 3개월 안에 하셔야 해요.


이혼 신고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하면 되지만 이혼 신고서에는 두 사람 모두의 서명이 들어가야 한다.

이혼신고는 이혼 확정을 받고 3개월 안에 진행해야 한다. 만약 3개월 안에 신고를 하지 않으면 이혼은 무효이다.


법정을 벗어나 차가운 복도에 서서 그가 나를 부른다.


- 서명해 줘. 신고는 내가 할게

- 아니, 서명은 3개월 뒤에 해줄게. 그 안에만 신고하면 되잖아.

- 그냥 지금 하지 뭘 미뤄?

- 미련 남아서가 아니야. 지금 서명해 주면 면접 제대로 이행 안 할 사람이잖아 당신은


무슨 말을 더 할까 두려워, 그 길로 달음질쳐 법원을 빠져나왔다.


그래.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야.

이혼 절차가 전부 끝나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면 면접 이행 따위는 절대 해줄 인간이 아니다. 나는 확신한다.

그러니 나도 순순히 서명해 줄 수는 없지.


앞으로 나에게 남은 3개월 동안 그는 아들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이혼신고가 끝나고 나면 그 뒤에는?

내 아들은 이제 고작 두 살인데, 아들이 나를 기억할리는 만무하다.

그 집에서 내 아들에게 나에 대해 어떤 악담을 쏟아놓을지도 너무 빤히 보인다.

전처의 아이에게 그랬듯,

내 아들에게도 네 엄마가 네가 싫어 버리고 도망 갔다고 말하면 어쩌지.

그 집안에서 나를 정신병자로 몰아세웠듯,

네 엄마는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어쩌지.

아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든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이코패스로 만들든 상관없어.

나는 그저 내 아들이 나를 잊고, 나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들을 잊고 엄마란 존재를 잊어버리는 게 그게 두려울 뿐이야.


3개월의 시간은 참으로 빨리 지나간다.

첫 면접 때 나를 보고 자지러지게 울던 내 아들은

이제 나를 알아보는 듯도 하다.

유모차에 앉아있다가도 내 목소리가 들리면 유모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어떻게든 그 짧은 다리를 딛고 서서 엄마 얼굴을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헤어지는 순간에도 뭘 아는지, 평소 잘 울지 않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눈물을 보인다.

헤어지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없이 차가운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고 목을 놓아 운다.

언제까지 이런 시간이 계속될까.


내 마음의 상태와 상관없이 시간을 빠르게 흐른다.

나는 마침내 이혼 신고서에 서명을 했고, 우리는 법적으로 남이 되었다.

그 후 첫 면접.

그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내일이면 아들을 만날 수 있단 생각에 아들의 기저귀며, 장난감, 먹을 것까지 바리바리 준비하며 들떠있는 나에게 띠로롱 문자 하나가 울린다.


- 아들이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으니 다음에 만나.

- 다음에 언제? 내일 안되면 정확히 다음 언제 만날 수 있는 건지 날짜 시간 알려줘.

- 그냥 다음에 연락해 줄게


또 한 번은

- 내일 비가 많이 온대. 다음에 비 안 올 때 만나

- 비 오면 우산 쓰면 되지, 내가 내 아들 비 맞게 할까 봐 그래? 헛소리 말고 데리고 나와


또 한 번은

- 너 만나고 오면 애가 너무 정신 없어져. 어린이집에서도 뭐라고 해. 그러니 다음에 만나

- 다음에 만날 때는 정신이 안 없어지고?


이런 끝없는 다툼 끝에 겨우겨우 만남을 가지면

남편이었던 인간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정말 꿈에도 보기 싫은 그의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나온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아무 말 없이 돌아선 적이 없다.

전 시어머니를 마주한다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만큼이나 끔찍하고 두렵지만

나는 엄마다.

내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나는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혼 신고를 한지 반 년이 조금 지난 어느 뜨거운 여름 날.

면접 시간에 맞춰 면접 장소에 나갔는데 아무도 나오질 않는다.

나는 면접 때 늘 부모님 혹은 오빠의 도움을 받아서 아이를 픽업했다.

당시에는 장롱면허였고, 차도 없는 데다 살고 있던 집은 너무 작고 또 멀어서 아이를 혼자 픽업할 수 없는 여력이 되질 않았다.

그날 역시 오빠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시간이 꽤 지나도 아이를 데려오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전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 누르고 문자를 보낸다.


- 왜 아무도 안 나와?

- 아 나 지금 여행 중이야, 집에 가봐. 엄마가 데리고 있을 거야.


오빠와 함께 그 집으로 찾아간다.

빼꼼히 열리는 문 사이로 내 아들이 뒤뚱거리며 달려 나온다.

시어머니가 나를 보고 뛰쳐나오는 아이를 잡고, 그 너머로 시아버지가 신발을 신는다.


나와 오빠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시아버지는 별의별 소리를 다 지껄였으나 핵심은 내 아들이 나를 만나고 오면 이상해지니 더 이상 만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그 집의 식모이자 노예이자 며느리로 살았던 그 시절엔 시부모가 한마디 하면 커다란 눈만 껌뻑이며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고,

그저 죄송합니다만 연발하던 등신 천치였을 테지만,

난 더 이상 그 집의 며느리가 아니다.

아들을 보여주지 않을 거란 전 시아버지란 사람의 말에 눈깔이 뒤집혔다.

켜켜이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울분과 설움을 눈물 한 방울 보태지 않고 차갑게 쏟아냈다.

나보다 더 냉정하고 두려울 것이 없는 오빠는 나보다 더한 노여움을 토해냈다.

길 한복판의 말다툼과 몸싸움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은 무슨 재밌는 구경이라도 난 듯 눈망울을 반짝이며 흘깃댄다.


더 이상 지지 않아. 더 이상 무섭지도 않아.

내 아들을 못 만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난 그게 뭐든 이제 더이상 좌시하고 있지 않을 거야.

난 엄마니까.

한바탕 다툼이 끝나고 법정 다툼까지 하겠단 얘기를 쏟아내고서야 꼬꼬맹이 아들을 데려온다.

내 품에 뜨겁게 안긴 내 아들은 연신 내 입에 뽀뽀를 해댄다.

오빠에게도 미안하고, 아들에게도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더 이상 나는 그게 누구이든, 무엇이든 두렵지 않다.

내가 두려운 건, 이 사랑스러운 동그란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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