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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프로그래머 Nov 30. 2020

남들보다 빨랐다.

빠른 것은 좋은 것일까?

나는 수술 이후 부모님께 항상 죄책감을 갖고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죄책감의 이유는 간단했다. 그 전에는 부모님께서 힘들게 일하시거나 할 필요 없이 외벌이로 적당히 살 수 있었는데 그런 안정감이 깨졌고 부모님이 더 힘들게 일하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의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었고 그 시절의 기억과 추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엎어진 물이 된 만큼 더 열심히 나아가야 했다. ‘괜찮아 나는 수술했으니까 적당히 살아도 돼’라는 안일한 생각을 집어던지고 ‘열심히 살아서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하루빨리 일 안 하시고 쉬실 수 있도록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나아갔다.



그 덕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돈에 대한 생각이 잡혔고 최대한 부모님 돈 지출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교복도 중고로 사거나 물려받았고 책도 새 책 보다 중고 책을 먼저 찾아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돈에 대한 생각도 트이고 철도 비교적 빨리 들었다. (물론 부모님 마음에 못을 박은 적도 많았다.) 그렇게 내 학창 시절은 왕따와 어중간한 학업으로 물들여진 채로 쏜살 같이 지나가버렸다.



진학한 컴퓨터 학과는 주간과 야간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지원 당시, 많은 고민을 하다가 야간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주간에는 공부를 하거나 알바를 하려고 야간으로 지원을 했고 합격했다. 운이 좋게도 좋은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공부 해나가 보니 적성에도 잘 맞는 듯했다. 계속 IT 업계에서 일하고 싶었고 6개월씩 2번 정도 학원을 다니면서 실무 기술을 익히고 각종 학내외 세미나, 컨퍼런스, 행사 등을 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웠다. 캠퍼스를 휘젓고 다니면서 온갖 정보란 정보는 다 수집했고 제공해주는 서비스, 교육 등에 최대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나는 교내 모든 선생님들, 직원분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 덕에 학교에서 지원해주 해외 어학연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어학연수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아버지는 무역회사에 재직하셨었다. 또한 무역회사를 창업해 운영도 하셨었다. 나는 아버지의 좋은 점들을 닮았고 자라면서 많이 보고 배웠다. 아버지는 5개 국어를 구사 가능하시다. 5개 국어는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인도네시아어, 영어다. 한국어 외 4개 국어는 의사소통에 문제없이 네이티브라고 할 정도로 잘하신다. 중국어는 지금도 중국으로의 여행을 목표로 계속 공부하고 계신다. 그렇다. 내가 아버지를 통해 타고난 것 중 하나는 언어 능력이다. 언어를 잘한다기보다는 언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외국인을 말하면 일단 들이대고 말을 걸어보는 스타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원어민 영어학원에 보내주신 점도 굉장히 도움되었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다.



또한 아버지의 사업 스킬과 도전 정신도 자라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음식점을 창업하고 사업을 유지하는 방법과 어떻게 사람을 운영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듣고 배울 수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부업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계속 호시탐탐 사업거리를 찾아다니고 계획하고 있다.



다시 어학연수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학연수 도시는 하와이 호놀룰루였다. 아버지의 어학과 해외에 대한 깨어 계신 생각 덕분에 어학연수 가는데 어렵지 않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도 가족과 1~2차례 해외여행을 다녀와봤기에 두렵거나 하지 않고 많이 기대되었다. 친구를 설득하고 담당자분께 부탁해서 같이 갈 수 있게 되었고 많이 즐기고 내 한계를 깨게 되는 좋은 기회였다. 영어 외에 많은 것을 배웠고 좋은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하와이의 모든 것을 즐기지 못했고 오하후 섬 외에 다른 섬을 못 가본 것이 많이 아쉬웠지만 만족스러웠던 어학연수였다. 이때부터 나의 눈은 국내에서 해외로 옮겨졌다. 내 가치관의 큰 변화였다. 어학연수를 반대하지 않으시고 학교의 지원을 받았지만 큰 비용을 지원해주신 부모님께 감사 또 감사하다.



하와이에서 영화관에 가서 <Frozen>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봤던 경험이 생각난다. 디즈니 영화로 자막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이해되었기에 재미있게 봤었다. 약 2개월 뒤 한국에 돌아왔더니 <겨울 왕국>이라는 영화가 흥행하고 있었는데 포스터를 보고 나서 알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봤던 <Frozen>이라는 영화가 겨울 왕국이라는 것을... 겨울왕국을, 그것도 크게 흥행한 영화를 하와이에서 미리 봤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여담으로 하와이에서 영화를 본 것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겨울왕국 2>가 나왔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속도가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해본다.



결과적으로 나의 대학 생활은 보람차고 만족스럽게 보냈다. 용돈을 위해 근로장학생으로 일도 해보고, 학점도 잘 받았고, 현장학습으로 기업에서 일하면서 실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나름 성실했던, 혹은 정보를 찾아다녔던 모습을 보셨기 때문인지 교수님들께 눈에 띄는 학생이 되었고 성적도 잘 나와 장학금을 받는 경험도 몇 번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취업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는 남자지만 군대를 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 수술로 인해 지속적인 약 복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군대를 가지 않아 약 2년, 전문대 졸업으로 인해 2년, 총 4년의 시간을 벌었다. 나는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를 잘 경험했다. 수술로 인해 힘들어했고 '운이 안 좋아.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생각했지만 군대를 가지 않아 좀 더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나의 사회생활은 남들보다 빨리 시작되었다. 빠르게 시작했던 만큼 어려움도 많았다. 군대 면제 사유에 대해서 면접 본 모든 기업이 질문했고 매번 구차하게 대답을 했다. 특히 "지금은 아무런 문제 없이 정기 검진을 다니며 약만 복용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강조해서 했다. 그럼에도 군대 때문에 탈락시킨 기업들도 종종 있었다. 나는 여러 기업에 계속 지원했고 점점 취직의 달인, 면접의 달인이 되어 갔다. 그러던 중 괜찮아 보였던 스타트업에 입사하게 되었고 나는 세상을 처음으로 맛보게 되었다. 세상의 맛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매웠고 혹독했고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4년 먼저 추운 세상으로 길을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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