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장흐름 Nov 14. 2020

믿음의 끈.

모든 인간관계는 믿음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 모든 인간관계는 믿음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믿음의 끈이 헐거운지, 팽팽한지, 아니면 꽉 조여서 숨이 막히는지는 우리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가장 친한 베스트 프렌드와는 믿음의 끈이 튼튼할 것이고,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한 사람과는 믿음의 끈이 얇고 연약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믿음의 끈을 두 개씩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새 일주일에 두 번은 버스를 탄다. 가끔 프로젝트나 약속이 있는 주간이라면 더 많이 타기도 한다. 엇, 잠깐 시계를 보니 지금 버스를 타면 늦을 것 같다. 택시를 불러야 할 것 같다. 택시는 버스보다 빠르니깐.


 실제로 나는 대학생이 된 첫 주에 지각을 면하기 위해 택시를 잡아 학교까지 간 적이 있다. 1교시인데 내가 강의실에 들어간 건 9시 20분, 시간표 상 명백한 지각이었다. 하지만 출석을 체크하는 교과 조교가 나보다 5분을 더 늦는 바람에 나는 택시비만 날린 셈이 되었다.


 택시 이야기로 돌아오자. 택시에 타고 좀 있으니 나이가 지긋하신 기사님께서 말을 붙여온다. 기분이 좋은 택시 기사님들은 꼭 수다쟁이가 된다. 그에 질세라, 나도 기분이 좀 괜찮으면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이것저것 말하게 된다. 오버하면 개인 정보까지 흘릴 정도로 대화하게 된다.


 가만, 지금 누구랑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지? 약속에 늦을 것 같아 찾은 택시 안에서, 처음 보는 기사님이랑 별 이야기를 다 하게 된다. 개인주의가 심해지는 세상에서 이 택시만은 예외인가 보다.


 또 언제는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이 승객들은 버스 기사가 어디로 운전할 줄 알고 믿고 타는 거지?", "버스 기사가 이상한 마음을 먹고 경로를 이탈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때 떠오른 생각이 바로 "믿음의 끈"이다.


 사람들은 출퇴근 길에 버스와 지하철, 택시를 당연하게 이용한다. 막말로 테러리스트가 운전할지도 모르는데, 그냥 믿고 타는 것이다. 여기에 "믿음의 끈"이 작동한다. '늘 별생각 없이 타 왔던 지하철이니까 오늘도 문제없겠지, 언제나 빠르고 편안한 택시니까 오늘도 문제없겠지' 라며 말이다. 운전하는 기사님들을 무의식 중에 신뢰하는 것이다. 그 기사님의 인품이나 오늘 하루의 기분을 전혀 모르지만, 나에게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셈이다.


 약속 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5분이 지나있는데, 오기로 한 친구도 아직인가 보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 그 친구는 늦더라도 안 올 친구는 아니니까, 조금만 지나면 "늦어서 미안~"하며 잰걸음과 함께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곧 오리라고 믿고" 기다린다. 이 때는 친구를 겪어본 경험으로 의식을 가진 채 믿는 것이다. 버스 기사님은 잘 모르지만 믿는 거고, 친구는 잘 아니까 믿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인간관계는 믿음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믿음의 끈이 헐거운지, 팽팽한지, 아니면 꽉 조여서 숨이 막히는지는 우리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가장 친한 베스트 프렌드와는 믿음의 끈이 튼튼할 것이고,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한 사람과는 믿음의 끈이 얇고 연약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믿음의 끈을 두 개씩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끈 :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생겨난다.


 믿음의 끈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친한 친구나 가족처럼 상대방을 잘 알고 있는 경우에도 쓸 수 있고, 버스기사처럼 한 번 보고 더 이상 보지 않을 사람에게도 믿음의 끈은 작용한다. 설령 상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이라 하더라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예를 들면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메신저에서 대화를 몇 번 나눈 사이, 재택근무여서 얼굴은 모르지만 업무 관련 이야기를 나눈 직장 동료와 같은 관계에서도 믿음의 끈은 존재한다.


 즉, 믿음의 끈이 있느냐 없느냐는 대상이 되는 상대방의 존재를 서로 알고 있느냐 모르냐로 구분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양쪽 모두가 서로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쪽은 상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나, 다른 한쪽은 상대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때에는 믿음의 끈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이제 막 연예인에 관심이 생겨 한 가수를 좋아하게 된 학생이 있다고 치자. 이 학생은 가수의 노래 영상이나 관련 기사를 찾아보면서 가수에게 대한 지식과 애정이 늘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학생이 가수와 메신저를 나누거나 팬미팅에 참가해 가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면 해당 가수는 이 학생을 모를 것이다. 따라서 이 관계 사이에는 믿음의 끈이 발생하지 않는다.


 믿음의 끈은 서로를 잘 알아갈수록 튼튼해진다.


 이 부분은 작가의 경험을 빌려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필자는 걸어서 3분 거리인 중학교를 나왔지만, 고등학교는 버스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그리 먼 곳은 아니었지만, 배정받아 들어간 1학년 교실에는 아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고,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지가 걱정되었다는 것이 둘째 이유였다.


 하지만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면서 교실의 전부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 시절을 보내면서 지금까지도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는 친구들을 곁에 두게 됐다. 그들을 알게 되는 시점이나 친해지는 순간은 전부 달랐다. 체육시간에 손가락을 다쳐 보건실을 찾고 있을 적에 이름도 모르는 내게 보건실 위치를 설명해준 아이가 지금까지도 막역한 친구가 되었으며, 당시 차갑던 나를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쳤던 친구들이 지금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친구 관계는 믿음의 끈을 대입하기에 매우 적절한 관계이다. 일단 우리에게는 모르는 사람이 친구가 됨과 동시에 믿음의 끈이 생겨난다. 이 끈은 두 개가 존재한다. 서로 왼손과 오른손에 하나씩 잡고 있는 그림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가 편할 것이다.


1번 그림: 믿음의 끈을 잡고 있는 두 사람, A와 B


 1번 그림이다. 이제 막 알게 된 친구 사이에는 두 개의 끈이 생겨난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그 순간에 발생한 이 끈은 매우 얇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또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에 따라서 이 끈은 변화될 수 있다. 1번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이 두 개의 끈으로 연결됐다는 사실이다. 가령,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100명이라면 쥐고 있는 믿음의 끈은 100 * 2 = 200개가 되는 셈이다. 여기부터는 설명의 간결함을 위해 왼쪽의 사람을 A, 오른쪽의 사람을 B라고 칭하도록 한다.


2번 그림: 서로를 잘 알게 되어 믿음의 끈이 튼튼해짐.


 2번 그림이다. 1번과 달라진 것은 끈의 두께이다. 1번과 비교했을 때, 2번의 끈은 두껍고 튼튼한 끈으로 바뀌었다. 이는 두 사람 사이에 충분한 친밀감과 신뢰가 누적되었다는 증거이다. 끈이 강해진만큼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으나, 무거워진 만큼 서로의 관계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때부터는 단순히 스치듯 아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인격을 이해하고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관계에 경중에 따라서 저 끈의 두께와 모습은 얼마든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지금 알고 있는 인간관계를 대입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양한 인간관계가 있지 않겠는가? 아는 친구에서 베스트 프렌드로 깊어지는 과정, 모르던 이성과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 더 나아가 부부가 되는 모습 등 여러 관계에 이 그림을 적용해볼 수 있다. 높은 신뢰도가 요구될수록 저 믿음의 끈은 튼튼해지고 또 동시에 무거워질 것이다.




믿음의 끈은 놓을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다.

3번 그림: 오해나 갈등으로 인해 끈 하나를 놓친 상황


 3번 그림이다. 여기서는 B가 2개의 끈 중 하나를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이유로든 둘 사이에 신뢰가 약해졌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둘이 원래 긴밀한 사이였는데 사이가 틀어졌을 수 있고, 원래 깊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관계 면에서 흔들린 것일 수도 있다. 그림에서 A는 두 끈을 모두 잡고 있으나 B는 하나의 끈을 놓았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다.


1. B는 자신을 자주 놀리는 A에게 싫증이 나버렸다.

2. B는 약속을 자주 어기는 A에게 불신이 생겼다.

3. B는 연락이 소홀한 A에게 의심을 품게 됐다.

4. A는 B와 친하다고 생각하지만, B는 A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범하기 쉬운 오류는 B가 끈을 놓은 사실만을 보고 무심코 B에게 부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B에게는 죄나 잘못이 없다. A의 실수로 인해 B는 상처 받은 입장일 수도 있고, B는 A에 비해 관계 유지에 큰 뜻이 없는 사람인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둘 사이에서 비도덕적이고 과격한 일이 있었다면 그때는 판단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그 상황은 배제하고 생각하도록 한다. 여기서는 일상 수준의 인간관계를 다룬다.


 오해가 있는 상황이었는데 A와 B가 시간을 갖고 진실된 대화를 나눈다면 둘의 사이는 1번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오히려 관계가 더 튼튼해져 2번 모형이 될 수도 있다. 이는 두 사람의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두 사람의 선택과 노력으로 인해 두 믿음의 끈이 모두 놓아질 때가 있다. 그 관계가 바로 아래 4번 그림이다.

4번 그림: 관계가 끊어짐


 이제 두 사람의 손에는 믿음의 끈이 들려있지 않다. 이것은 관계의 끝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똑같은 우를 범할 수 있어서 한 번 더 첨언한다. 우리는 4번 그림에 무심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면 안 된다.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난 글 <가치의 다름을 이해하기.>의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존재와 사실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의미는 사람들이 그 사실에 부여하는 것이다. 4번 그림이 내포하고 있는 객관적 사실은 "관계의 끊어짐"이다. 단어를 바꾸면 "관계의 소멸", "관계의 종료"로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이 그림에 '긍정' 혹은 '부정'이라는 감정을 매겨버리는 순간 우리는 주관적으로 관계를 해석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저 두 사람의 관계가 사라진 것은 좋은 일일 수도 있고 슬픈 일일 수도 있다.


4번 그림의 예


 관계가 종료되는 과정도 다양하다. 여기서 왼쪽 그림은 한쪽이 먼저 관계를 놓아버린 경우이고, 오른쪽은 양쪽이 관계를 종료한 모습이다.


왼쪽에 포함될 수 있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 A는 B와 연락하는 친구 사이였는데, B가 돌연 행방을 감추고 사라졌다.

- A와 B는 연인이었는데, B가 A에게 이별을 먼저 통보했다.


오른쪽에 포함되는 상황은 이렇다.


- A와 B는 부부였으나 합의 이혼을 했다.

- A와 B는 친구였으나 어떤 일을 겪고 절교했다.


 이 둘에는 조금의 시간차가 있을 뿐, 왼쪽의 모형도 결국에는 오른쪽의 그림처럼 된다. 3번 그림에서는 B가 놓은 끈을 다시 주울 수 있다는 선택의 기회가 있지만, 4번 그림에서는 재선택의 기회가 없다. 한쪽이 두 끈을 모두 놓았거나, 양쪽이 끈을 모두 놓아버린 경우에는 다시 1번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믿음의 끈 열어보기


 위 단락까지는 믿음의 끈의 대략적인 설명이었다면, 여기부터는 작가의 주관으로 해석한 믿음의 끈이다. 필자는 모든 인간관계에는 어떠한 뜻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관계에는 교훈이 들어있다고 믿는 편이다. 하지만 그 뜻을 빠르고 쉽게 알아내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인간관계는 나와 다른 사람을 알아가며 생기는 것이므로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예측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동안 살아온 배경과 지향하는 가치가 다르며,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속도가 제각각이다. 특히, 20대인 지금은 10대 때에 비해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관계가 적어졌음을 절감한다. 고등학교 때 사귄 친구들과는 큰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휴지에 물이 젖듯 자연스럽게 친해졌는데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새로 알게 된 사람과 믿음의 끈 2번 모형처럼 둘 사이의 유대가 깊어지고 튼튼해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믿음의 끈은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나의 개념을 정하고 싶어 "믿음"이라는 어휘를 썼지만, 이 끈이 <믿음의 끈> 일지 <의심의 끈> 일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여태껏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을 리플레이해보자. 누군가와의 관계는 자동차의 안전벨트처럼 소중하지만,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는 사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지 않던가?


 모든 사람이 1번 모형으로 시작하지만, 그 관계가 시간이 지나 2번이 될지, 4번 모형이 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때로는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선택과 노력을 해야 할 때가 있으며, 어쩔 때는 관계를 내려놓고 정리할 시기가 온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두 명의 사람 사이에도 다른 생각이 존재할 수 있다. A는 B와 더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B는 A를 마냥 반기지 않는 그런 경우 말이다.


 만일 인간관계에도 수학 문제처럼 확실한 해법과 공식이 있다면 사람들은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문제를 두고 수도 없이 고민한다. 그 고뇌와 힘듦이 있다는 것은 인간관계에는 정해진 법칙과 풀이법이 없다는 증거이다. 도서나 유튜브 등의 매체에서 "인간관계"를 둘러싼 콘텐츠는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방법을 썼더라."라며 방법론을 소개하는 것이지, 그 내용도 100% 맞는 "법칙"은 아니다. 그들은 인간관계를 보다 이롭게 풀어나가기 위한 거대한 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앞으로 소개할 내용도 인간관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이론일 뿐이지, 정확한 법칙은 아니라는 점을 늘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이전 글: <가치의 다름을 이해하기.>


다음화 미리 보기


 이제는 가면을 벗고 솔직한 자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계속해서 가짜 자아로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본질적인 나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설령 가면을 쓴 모습이 진짜 자신보다 더 대단해 보인다고 해도, 우리는 가면을 내려놓아야 한다. 언제까지 가짜 인격으로 살 텐가? 나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가면은 내려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면을 쓰면 상대가 우리의 진짜 마음을 눈치챌 수 있겠는가? 거꾸로 우리 역시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말해도 가면을 꼭 써야겠다면, 나는 말리지 않겠다.




[이것저것 생각 나눔]


의미와 의식은 사람이 부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대상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해도 거기에 사람의 판단이 개입하면, 그때부터는 주관이 섞이는 것이고 가치 판단이 되는 것이죠. 자신이 평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 본인이 의식해서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이 생각을 거친다면,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은 우리의 주관적인 인식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원래부터 기분 나쁜 것은 없습니다. 도로의 차가 빗물을 쓸며 지나가 내 바지가 더러워져 짜증이 난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자동차가 지나가기 전과 후에 달라진 것은 "바지에 물이 튀었냐, 튀지 않았냐"입니다. 만약에 물이 튀어서 짜증을 낸 것이라면, 똑같은 상황을 겪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죠. 그냥 튄 것뿐이라며 갈 길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만치 멀어진 자동차를 향해 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 정도는 시원하다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내 기분이 나빠진 것은 바지가 젖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연한 상황에 내 의식이 기분 나쁨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우리의 의식이 선택하는 방향의 결과입니다. 이를 적용해 다시 생각해보면, 바지에 물이 튄 것은 의식하는 바에 따라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 원인이 아니라 개인의 의식이 원인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본문에 사용된 1~4번의 그림은 인간관계의 단계, 양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친해져 믿음의 끈이 튼튼해진 2번 그림이 3번이나 4번 그림보다 낫다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갈등 자체를 기피하는 평화주의자 성향의 인물이 있는가 하면, 속 시원하게 싸우고 감정을 털어놓아야 편안해하는 타입의 사람도 있습니다. 마냥 튼튼해 보이는 2번 모형이 3번보다 건강한 관계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좋아 보일수록 좋은 관계다."는 문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기는 겉보기 값은 실제 가치와는 다르기 때문이죠. 그리고 실제 가치는 누구도 매길 수가 없습니다.


 아래에는 <믿음의 끈>과는 다른 느낌의 고찰 내용을 수록합니다. 혼자 생각하다가 간단한 미적분 식을 이용해 인간관계를 표현해보았습니다. 정리된 글이 아니고 혼자 기록했던 글이므로 재미로, 감상하는 정도로만 보시기를 권합니다. (정제된 글이 아닙니다.)


"저 사람을 알아간다"에 대한 고찰, 앎의 정리(K)

매거진의 이전글 가치의 다름을 이해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