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최소 두 사람이 있으면 무엇이 시작되는가? 바로 인간관계다. 앞으로 나눌 수많은 이야기의 메인 주제는 인간관계이다. 가끔은 이 관계를 설명하고자 우주 저편에 있는 예시를 가져올 것이다. 갑자기 뜬구름 잡듯 원자와 분자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가끔은 고인이 된 철학자나 심리학자의 문장들을 인용할 것이다. 어떤 내용은 설명이 어려워 몇 문단을 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글에 녹을 때까지는 글자를 아끼지 않으려 한다. 긴 글이 곧 시작될 텐데, 독자가 흥미로운 마음으로 읽어주기를 바란다.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
아이러니한 문장으로 글이 시작되었다. 대뜸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니, 작가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게 분명하다. 세상에 의미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는 것, 맛있는 식사를 즐기고 친구들과 풍성한 대화를 나누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전부 의미 있는 것들이 아닌가?
그렇다. 앞서 말한 것들은 '누군가'에게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존재 자체만으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있다고 해도 그 작품은 시각 장애인에게는 의미가 없으며, 작곡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음악이 있어도 그 곡은 청각 장애인에게는 무익하다. 현금 뭉치 100만 원이 있다고 해도 우주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그것은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에 지나지 않는다. 즉, "가치"는 그 값을 매기는 평가자가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가치 평가자가 없다면 그 어떤 대상이라도 의미가 없다. 그리고 가치 평가자에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책정되는 값어치와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는 문장은 앞으로 하게 될 수많은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문단이 소모되어도, 내용이 중복되어도 꼭 이 개념을 확실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자칫 언어가 부족하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므로 반복해서 설명할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의 시선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나씩 짚어가 보자. 가볍게는 봉사활동, 자기 계발을 위한 독서, 청소 및 방 정리 정도가 떠오른다. 순수한 의도로 남을 돕는 봉사활동은 아름다워 보인다. <연탄 나눔, 사랑의 도시락 나르기, 숲길 가꾸기 프로젝트..> 몇 글자 읽지도 않았는데 벌써 가슴이 따스해지는 기분이다. 실제로 봉사활동을 통해서 진로를 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봉사로 덕분에 큰 행복을 누리는 사람도 있다. 가만히 보면 봉사활동은 참 의미 있는 활동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봉사활동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주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활동이 되기 위해서는 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보수를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비로소 그때서야 봉사자의 행동과 수혜자의 마음에서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마음을 합하지 않는다면 연탄 나눔은 그저 연탄의 위치가 바뀌는 것 말고는 달라지는 게 없다. 청소 역시 마찬가지다. 청소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달라지는 것은 먼지의 위치밖에 없다. 청소의 의미는 "누군가가 땀을 흘리며 팔을 움직이는 노력", 그리고 "깨끗함을 누리는 사람들의 감사"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눈치가 빠른 독자들은 위의 몇 문단을 읽으며 무언가에 가치가 생기기 위해서는 최소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만일 세상에 사람이 1명밖에 없다면, 그 사람이 그 어떤 행동을 해도 거기에는 의미가 없다. 그 사람이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길거리의 쓰레기를 정리했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왜냐면 쓰레기를 줍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위의 문단에서 티끌만큼이라도 의미가 생기기 위해서는 "순수성, 예술성, 심미성, 도덕성, 윤리성" 등이 포함되어야 함을 설명했다. 봉사활동과 청소를 예로 들은 그 문장이 표현하고 있는 바가 도덕성과 순수성을 예로 들은 부분이다. 하지만 가치가 발생하는 지점인 "순수성, 예술성, 심미성, 도덕성, 윤리성" 역시 최소한의 다른 한 명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는 개념들이다.
이 세상에 최소 두 사람이 있으면 무엇이 시작되는가? 바로 인간관계다. 앞으로 나눌 수많은 이야기의 메인 주제는 인간관계이다. 가끔은 이 관계를 설명하고자 우주 저편에 있는 예시를 가져올 것이다. 갑자기 뜬구름 잡듯 원자와 분자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가끔은 고인이 된 철학자나 심리학자의 문장들을 인용할 것이다. 어떤 내용은 설명이 어려워 몇 문단을 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글에 녹을 때까지는 글자를 아끼지 않으려 한다. 긴 글이 곧 시작될 텐데, 독자가 흥미로운 마음으로 읽어주기를 바란다.
인간관계는 타인과의 접촉에서 시작된다.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이 필요하다. 자신과 타인은 "다른 자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즉, 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름"이라는 개념을 다룰 필요가 있다. 시리즈의 첫 글인 이 글에서는 "다름"을 집중적으로 나눌 생각이다.
취향 이야기 : 짜장면과 짬뽕은 다른 것이다.
- 틀림이 아닌 다름이라면, 그곳에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다.
필자가 "다름"을 두고 이야기할 때 항상 언급하는 소재가 있다. 바로 짜장면과 짬뽕이다. 중식집에 들어가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고민한 시간들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달달한 면이 당겨서 짜장을 고를 수도 있고, 함께 식당에 들어온 다른 친구는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어 짬뽕을 주문할 것이다. 이들의 주문에는 취향에 의한 선택만이 있었을 뿐, 오답이 없다.
짬뽕을 너무도 좋아하는 친구(A)가 짜장면을 주문한 친구(B)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아니, 이 집은 짬뽕으로 유명한데 너 짜장면 시켰다고?"
이 문장 하나를 갖고 어떤 사실들을 추론해볼 수 있을까? 몇 개 되지 않으니 세어 보자.
1. A는 이 식당에서 짬뽕을 주문했다.
2. B는 이 식당에서 짜장면을 주문했다.
3. A는 이 식당이 짬뽕으로 유명한 집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4. B는 이 집이 짬뽕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몰랐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짜장면을 주문했다.
5. 대화의 재미를 위해서 A는 짜장면을 시킨 B에게 조금 비아냥거린 것으로 보인다.
6. A는 짜장면을 주문한 B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B의 주문을 재확인하였다.
이것저것 짐작을 하면 더 많이 찾아낼 수 있겠지만, 소설이 될 것 같아 여기서 그치도록 한다. 저 6가지 추론 중에서 가장 확실한 추론은 1번과 2번이다. A는 짬뽕을, B는 짜장면을 주문했다는 추론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각각 짬뽕과 짜장면을 시킨 걸까?
답은 명쾌하다. A는 이 식당에서 짜장면보다 짬뽕이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고, B는 반대로 짜장면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두 사람의 짬뽕과 짜장면은 각자 지금의 입맛, 평소 취향, 가격을 따져가며 종합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중식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쯤 되면 짬뽕과 짜장면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왜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가 말하고 싶은 진짜 내용이다.
"야, 너 여기서 짜장면 시킨 건 잘못됐어. 얼른 짬뽕으로 바꿔."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이 식당에서 짬뽕이 얼마나 맛있든, A가 얼마나 짬뽕을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A가 B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고 짬뽕만이 옳다는 식으로 열을 올린다면 이 때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짜장면을 시킨 B에게는 잘못이 있는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잘못이 없다. A의 생각과 B의 생각이 다르다 해도 그것은 엄연히 "다름"에서 끝난 문제이지, 짬뽕이나 짜장면이냐에는 정답이 없다는 소리이다. 이 둘은 식사 메뉴만 다를 뿐, 짬뽕과 짜장면을 각자 즐기면 된다. 서로 친해서 나눠먹는 것도 OK이다.
중국집 이야기로 비유했으나, 내용의 요지는 "다름을 이해하기"이다. 이 넓은 지구에 인간이 자신 하나뿐이라면 남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생각이 바로 행동이 되어도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인구가 곧 80억이 되어가는데, 혼자 살아가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다름"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와 "비슷한", "닮은" 사람들을 만났을지언정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인생은 다름을 마주하는 연속적인 과정이다. 그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여 상대와 거리가 멀어지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다름"을 인정하고 다가가는 가운데 서로 마음이 열린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나눌 이야기는 "다름"을 전제한 상태에서 시작할 것이다. 지금 여기부터 우리의 기본값은 "다름"이다.
다음화 미리 보기
그렇다. 모든 인간관계는 믿음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믿음의 끈이 헐거운지, 팽팽한지, 아니면 꽉 조여서 숨이 막히는지는 우리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가장 친한 베스트 프렌드와는 믿음의 끈이 튼튼할 것이고,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한 사람과는 믿음의 끈이 얇고 연약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믿음의 끈을 두 개씩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저것 생각 나눔]
* 이 아래에는 본문과는 거리가 있으나 해당 본문의 설명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기록합니다.
오늘 작게나마 생각해 볼 주제는 "가치는 누가 붙이는 것이냐?"라는 물음입니다. 독자 여러분, 독버섯은 위험한가요? 늘 엄선된 식용 버섯을 먹는 사람들은 독버섯은 위험한 녀석이라고 속단하기 쉽습니다. 물론, 저도 독버섯은 잘못 취급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독버섯은 위험하지 않아요.
독버섯을 떠올리고 있는 우리가 독버섯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독버섯도 하나의 개체일 뿐입니다. 어쩌다가 독이 있는 채로 만들어진 것이지, 버섯이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첩첩산중에 있다면 그게 독버섯인지 아닌지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잖아요? 즉, 독버섯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는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습니다. 독버섯이 어떤 존재인지 판단하는 존재가 없다면 독버섯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겁니다. 본문에서 현금 뭉치 100만 원이 있어도 의미가 없다고 표현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독버섯 이야기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현금 100만 원의 가치를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돈이 귀한 것이죠.
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가치"는 그 대상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판단한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인간관계니까 동물들의 생각은 조용히 빼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저는 어디라도 외출을 나가면 사진 찍는 것을 즐겨합니다만, 제 친구들은 사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진의 가치를 높게 여기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죠. 극단적이지만 이 순간 지구의 모든 사람이 사라진다면, 사진의 가치는 0이 됩니다. <대상에 대해 판단할 사람이 없으면 가치는 0이 된다.>, 이런 결론도 나올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