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는 아마 계속 공원을 생각할 것이다. 그는 원래 밖에서 살아야 정상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안에서 사는 걸 정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당연히 자신의 결단은 아니다. 나른하게 소파 위나, 특별히 몸을 반쯤 감춘 커튼 뒤 같은 곳에 위치했을 때 나에게 그는 안락해 보이지만 그저 불안의 극복 형식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나의 개로 통용되는 그 개는 나의 집 안에서 사는 개이고 가끔 집 밖으로 외출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개의 청력은 사람보다 뛰어나다. 인간에겐 이른바 가청대역이란 게 있다. 물론 가시 대역도 있다. 수치상으로 성인이 주파수 2만 3000Hz까지 듣는다면, 개는 주파수 4만 5000Hz까지, 즉 더 높은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작은 소리도 더 잘 듣는다. 거리로는 개가 사람의 가청 거리보다 4배 더 먼 거리에서 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나와 개가 함께 있는 공간을 기준으로 개의 능력을 적용하면 소파 위에서나 커튼 뒤에서 나의 개는 항상 나의 집 밖을 인식한다.
지난 하반기 이래 개와 내가 사는 집 밖에서 공사가 이어지고 있다. 단층 단독주택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주상복합이나 다세대 같은 높은 건물이 올라간다. 지금도 밖에선 뭔가를 가는 듯한 꽤 높고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린다. 인간인 나에게 불편할 정도면 개에겐 고통스러울 수 있다. 나와 동거 중인 이 개들은 특히 소리에 민감한 종으로 알려져 있다. 커튼 뒤나 소파 위 저들의 평온한 자세는 평온해서라기보다는 평온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취해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
한동안 나는 주말이면 계속 광장을 생각했다. 광장의 가능성과 광장에서 발견되어야 할 희망의 근거를 생각한다. 나는 생각을 했다. 집 안에서 광장을 생각하는 것과 집을 떠나 광장의 부분이 되는 것 사이에 차이와 구별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떤 이들에겐 집 밖에서 들리는 소음만큼이나 불편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광장의 본질이 구획이 아니라 개방일진대 그 차이는 원래 존재해서 안 되는 차이였다. 사람들이 모여 광장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선언하는 순간 광장이 소멸한다. 반면 그 범위를 사수하지 않는다면 광장은 생성되지 않는다. 결국 광장은 그 자체로 탈(脫)광장을 내포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광장은 탈광장을 기도하는 한에서 사수되어야 할 진지일 수밖에 없다. 광장은 생성과 소멸의 아슬아슬한 균형 사이에서 광장에서 생성된 열기를 광장 너머로 넘겨주는 잠정적 존재이나 우리는 그 잠정성 안에서 미래를 기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이 그렇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랑받을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의 '과정'이고 '몰락'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을 광장을 바꿔 넣어도 유효하다. 그러나 인간이나 광장이나 꼭 위대해야 하는지 또한 의문이다. 그것이 강박이 아니라고 입증하기는 힘들다.
반면 나의 개에게 공원은 차이와 구별이 부재한 온전히 실현된 광장으로 향유된다. 나의 개에게서는 어떠한 강박도 검출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이 집 안에 사는 동물임을 정상으로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그러하다. 결국 나의 개에게 삶의 강박은 없지만, 존재 자체의 강박이 불가피하다고 할 때,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쳐진 강박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식해낼 도리가 없다는 본원적 비애가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