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침입자>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과 전개를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침입자>는 미스터리 스릴러를 표방한 작품이다. 미스터리와 스릴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침입자’라는 제목은 거의 모든 것을 말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은 침입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침입하려는 자와 침입을 막아내려는 자 사이의 공방이 영화를 채우겠구나를 예상한다. 관심사는 침입의 동기가 무엇인지와 침입이 성사되었는지로 좁혀진다. 당연히 동기가 더 중요하다.
‘침입’의 동기가 중요하다
침입의 성사 여부는 제작진의 선택에 달렸다. 침입이 성공하는 결말이나 실패하는 결말이나 모두 가능한 결말인 반면 모든 동기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개연성이란 말로 표현해도 좋고 영화적 설득력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침입’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상실’로 시작한다. 나중에 밝혀지듯, 두 가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된다. 극중 서진(김무열)은 뺑소니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고통스러워한다. 어린 딸에게는 엄마의 사망을 알리지 못하고 적당히 둘러댄 상태. 각각 아내와 엄마를 불의의 사고로 잃은 두 사람은 사고 후 서진의 부모 집에서 살아간다. 여기까지가 ‘상실’의 풍경이다.
이제 ‘침입’이 시작된다. ‘상실’은 ‘침입’에 대체된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침입’의 도입부 기능만으론 ‘상실’이 좀 과하다는 느낌을 받을 법하다. 제작진의 설명은 이렇다. “실종됐던 동생 ‘유진’이 25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뒤 가족들이 조금씩 변해가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오빠 ‘서진’이 동생의 비밀을 쫓다 충격적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미스터리 스릴러로, 가장 일상적인 것들이 비틀리는 순간의 서스펜스를 담아내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 몰입도를 선사할 작품이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듯, 서진은 ‘상실’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서진의 부모는 나중에서야 ‘침입’으로 밝혀진 ‘회복’의 기쁨을 만끽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실종된 딸이 25년 만에 살아 돌아 왔고, 그것도 멀쩡하게 장성하여 돌아 왔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25년 만에 '상실'은 '회복'으로 극복된다.
처음 본 자신을 친근하게 “오빠”라고 부르는 유진(송지효)을 어쩐지 불편하게 여기는 서진에게 회복은 일어나지 않는다. 밖으로 드러난 이유는 아내의 사고사라는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난 ‘상실’에서 헤어나지 못한 탓이지만 영화가 진행되며 밝혀지듯 회복이 사실은 침투이며 다른 가족에게 (가짜로 판명되는) 회복이 일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상실’이 주어졌음을 ‘무의식’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이공원에서 동생을 잃어버린 어린 날의 경험은, 성인이 되어 아내를 뺑소니 사고로 잃는 비슷한 ‘상실’의 경험과 중첩된다. 영화의 주된 무대인 서진의 집(정확하게는 서진 부모의 집)은 한국 기준으론 대저택에 가까운데, 규모나 호사스러움과 별개로 과거 동생이 지내던 방을 그대로 떼어다 신축하는 집에다 붙였다는 괴상한 건축학적 특징을 지닌다. 트라우마를 건축학적으로 구현한 집인 셈이다.
영화는 이 트라우마에서 미스터리의 단서를 찾아보라고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암시를 준다. 암시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손원평 감독은 “집, 그리고 가족이라는 건 보편적인 개념이지만, 그런 일상적인 소재가 비틀렸을 때 오히려 더 생경하고 무섭고 이상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에 일어난 ‘상실’이 현재 상황을 지배하며 ‘침입’을 만들어낸 것은 맞지만, 그 최초의 ‘상실’은 현재의 ‘상실’의 직접적인 모티브라기보다는 원인(遠因)에 머문다는 설정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감독의 작가적 능력이 결부되어 간섭과 중첩이 일어나서 관객이나 기자 평론가, 심지어 감독 자신까지 혼동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 영화의 키워드는 가족이 아니다. 그보다는 스톡홀름증후군에 기반한 어린이 납치극으로 보아야 한다. 감독의 역량이 돋보인 대목으로, 꽤 오랫동안 긴장과 미스터리를 유지하며 ‘침입’의 이유를 은닉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가족과 전혀 관련이 없다. 침입하는 자인 ‘침입자’의 관점을 유지하면 침입자에겐 가족과 집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침입당하는 이들만이 가족과 집이란 허상 안에서 침입자를 반길 뿐이다. 양자 사이에 드러난 이러한 상반된 관점과 작용이 미스터리와 스릴의 기반이 된다. 왜냐하면 한쪽의 의도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반면 다른 한쪽의 의도는 철저하게 숨겨졌고, 이러한 상반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앞쪽은 한쪽이 지배하고 뒤쪽은 다른 편이 지배하는 불일치와 상충이 영화 전편을 관철하기 때문이다.
관계보다 사건이 초점이었어야
아내의 뺑소니 사고의 범인을 찾기 위한 서진의 최면치료가 영화의 핵심얼개를 형성한다. 아내를 치고 달아난 차량과 운전자를 기억해내려는 목적의 최면치료는 사고현장을 탐색하다가 번번이 서진이 어릴 적에 동생을 잃어버린 장면의 기억으로 돌아가 고착된다. 유진을 잃어버린 데에 서진의 책임, 어쩌면 심각하고 무시무시한 책임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듯한 기억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최면치료를 통해 불러낸 그 기억에 등장한 집요한 고착은 서진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유진 자체를 지목한다. 손 감독이 제시한 무의식의 발화법이라고 봐도 좋겠다. 영화의 구성은 매우 정교하고 짜임새 있어 저절로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의식과 무의식, 과거와 현재, 과거의 상실과 새로운 상실, 침투와 방어 등 사건은 다양한 축에 걸쳐져 치밀하게 전개됐다.
종교집단에 납치된 여동생이 그 집단에 동화하며 중요한 구성원이 되고, 나중에 그 집단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대체물, 즉 어린 소녀를 납치하는데 그중 한명이 자신 오빠의 딸, 즉 조카가 된 것은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다. 사이비종교와 광신이 개입한 어린이 납치 모의극이라고 정의하면 이 영화는 꽤나 볼만한 영화가 되었을 터이다.
감독의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살짝 탈선했다면, 아마도 감독이 고민 끝에 집어넣었을 마지막 장면이 상징하는 영화적 클리셰이다. 영화의 결말은 유진이 서진의 진짜 동생인지 아닌지를 열어놓고 끝난다. <침입자>의 열린 결말은 어쩌면 다른 맥락이었다면 유용했겠지만 지금과 같은 구성에서는 유해했다. 최면치료를 통한 기억이 사건현장을 훑다가 과거 동생을 잃어버린 장면으로 계속 돌아가도록 한 설정은, 사건현장을 담은 마음 깊은 곳의 동영상이 의식이란 필터를 통해 전하는 최선의 메시지라고 하겠다. 보았지만 식별하지 못한 의식의 주체에게 다른 방식, 어쩌면 무의식이 작동시킨 암호가 어린 날 동생과의 이별 장면이라고 한다면, 현실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면서 마침내 기억 속의 암호를 풀어내어 마주 대한 게 현재 동생의 모습이다.
수미상관으로, 손을 놓음으로써 두 번의 떠나보냄을 완성한 것까지 유진이 서진의 동생이 아니어야 할 어떤 미미한 사유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생으로 표현된 혈연은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기보다는 ‘~불구하고’의 의미를 훨씬 더 강하게 띤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에게서 흔히 목격되듯, 그들에게 가족은 광신도집단이지 세상의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광신적 종교집단에 동생을 빼앗긴 남자가 25년의 간극을 두고 그 종교집단에 아내를 살해당하고 딸을 빼앗길 뻔 했으며 심지어 사건의 주모자가 바로 동생이었다는,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자행된 광신의 행태가 이 영화가 그렸어야 할 내용이다. 가족과 집의 의미는 양념 정도로 족했을 것이다.
상당한 수작이 되었을 <침입자>의 완성도를 갉아먹은 건 영화적 클리셰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 가족과 집에 대한 막연한 집착이었다고 판단한다. 가족이란 의미 부여 없이 사건 자체의 흐름에 건조하게 충실했으면 더 좋은 영화가 되었으리란 아쉬움을 남긴 작품이었다. 더불어 감독의 역량이 조금 더 무르익으면 기대할 만한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했다. 6월 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