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건즈 아킴보>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건즈 아킴보>의 홍보문구에는 “핵존잼 보장하는 익스트림 킬링배틀의 탄생”이란 말이 들어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킬링배틀’이니까 액션영화이고, ‘핵존잼’이니까 코믹한 요소가 담겼다. 두 가지가 섞여서 잘 결합돼 있다. 전형적인 만화적 구성이고, 영화 속에서도 만화로 ‘패러프레이즈’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토요일 아침에 보는 만화 같은 영화”라는 ‘Atom Insider’의 평이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니지 싶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만화, 재미, 배틀 같은 것만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감독이나 제작진이 생각하지 못한 의미의 지평으로,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존재와 의미의 비말이 퍼져나간다. 산불 번지듯이 말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주연 배우부터 살펴보자.
소년 ‘해리 포터’의 반전(反轉)된 성인
영화에 아주 정통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건즈 아킴보>의 주연 배우를 보며 어딘지 친숙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한데 꼭 아는 배우 같지도 않다.
<건즈 아킴보>의 주연배우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주인공 소년과 동일인물이다. 아역배우로는 래드클리프만큼 전 세계인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이는 없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다. 소년은 쉬이 성인이 되고 성인은 성인의 세계를 새로 개척해야 한다.
2001년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로 시작해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해리 포터와 불의 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1부>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2부>까지 래드클리프는 10년을 ‘해리 포터’로 살았고, 관객은 그를 ‘해리 포터’로 기억했다.
소년 래드클리프에게 ‘해리 포터’는 엄청난 행운이었지만, 성인 래드클리프에게 ‘해리 포터’는 질곡이다. ‘해피 포터’로부터의 탈출이야말로 성인이 된 배우 래드클리프에게 필사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해리 포터’ 시리즈와 작별한 후 10년 가까운 시간을 성인 배우로서 새로운 연기인생을 여는 데 몰두했다. 앨런 긴즈버그 작가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담은 <킬 유어 달링>(2013년)에서는 본인만의 신념을 갖고 문학 혁명을 꿈꾸는 인물을 섬세한 내면 연기로 그려내는 데에 도전했다. ‘해리 포터’로 고착된 이미지를 탈피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소화할 능력을 보여주는 게 래드클리프에게 주어진 시험이었다면 <건즈 아킴보>는 가장 큰 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건즈 아킴보>에서 래드클리프에게 주어진 배역은 파리 한 마리 못 죽이지만 키보드만 잡으면 터미네이터가 되는 찌질남 ‘마일즈’. 진짜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생존전투게임 ‘스키즘’에 강제로 로그인되면서 익스트림 킬링배틀에 억지로 참가하여 싸우게 된다. 영화 초반부에 찌질남 마일즈의 양손에 각각 하나 두 개의 총이 수술을 통해 기계적으로 부착된다.
래드클리프는 게임 개발자 캐릭터로 변신한다. 덥수룩한 수염에 오리 무늬 팬티, 체크 가운, 곰발 슬리퍼를 착용한 한 마디로 ‘너드’를 연기한다.
역발상의 연출
<건즈 아킴보>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제이슨 레이 하우덴 감독은 “액션 히어로가 되기 싫어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액션을 찍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폭력을 싫어하고, 총기 소지를 반대하는 평범한 남자가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상황을 설정하기 위해 감독은 손에 못이 박힌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영화의 핵심 캐릭터는 십자가의 예수에서 비롯한 것일 텐데, 타의에 의해서 손에 무엇인가가 박힌 점은 마일즈나 예수나 동일하다. 하지만 마일즈의 손에 박힌 ‘못’의 용도는 손의 주인이 죽어갈 때까지 몸을 지탱하도록 한 십자가상의 예수의 손에 박힌 것과는 달랐다. 마일즈 손의 못은 총을 인체에 결합케 하는 일종의 볼트 같은 기능이었으며 죽어갈 몸을 지탱할 용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부착되어 타인을 죽이기 위한 용도였다는 차이를 보인다.(일반의 인식에 광범위하게 퍼진 오해 가운데 하나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손에다가 못을 박았다는 것이다. 손에다가 못을 박으면 신체의 무게를 못 이겨 손이 찢어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손목에다 못을 박았다. 만일 손에다 못을 박게 되면 손목을 십자가의 가로나무에다 밧줄로 감았다.)
‘불경’을 피하기 위해서 명시적으로 언명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마일즈는 예수 캐릭터의 키치적이고 펑크적인 재해석의 결과물이다. 찌질남 예수, 게임하는 예수, 살인하는 예수, 그리고 세상을 구하는 예수. 재해석이, 구세주이자 슈퍼스타인 예수의 원래 이미지를 크게 훼손하지 않았다는 관점이 얼마든지 가능하겠다.
감독은 게임화한 세상을 패러디하기 위해, 극중에서 실제 목숨을 걸고 격투를 벌이는 게임 ‘스키즘’을 도입하지 않았을까. 검투사의 싸움을 보며 즐긴 로마의 공공 엔터테인먼트와 타인의 비밀을 훔쳐보는 시대를 초월한 관음증은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공공연하게 향유되고 있다. 원시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현대의 대용품이란 감독의 생각은 약간 정정이 필요하다. 현대인에게 잔존한 원시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고안물로.
하우덴 감독은 제작 과정에서 영화 <러닝맨>과 <터미네이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러닝맨>에서 대중에 의해 사냥을 당하는 부분을 SNS에 접목시켰으며, <터미네이터>에서는 약자가 감당할 수 없는 강한 상대에게 쫓기는 설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내 ‘마일즈’와 ‘닉스’를 탄생시켰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소재들을 결합한 감독의 독창적인 발상이 <건즈 아킴보>의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을 관전하는 듯한 영화로 작품을 완성하는가 하며, 히어로가 되기 싫어하는 캐릭터가 ‘권총 손’이 된다는 설정, 가녀린 체구를 가진 여주인공의 강렬한 전투력 등 말하자면 절대 서로 붙지 않을 것 같은, 혹은 완전히 상반된 것들을 하나로 만들어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우덴 감독은 “<건즈 아킴보>가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 영화이길 바랬다.”며 “이 영화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여 영화에 자신들의 마음과 영혼을 갈아 넣은 사랑의 결과다. 이 광기를 선동한 걸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웃기고 이상하고 미친 영화 같았다”는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말 또한 하우덴 감독의 발언과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웃기고 이상하고 미친 영화
관객이 찌질남 마일즈를 보며 예수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 숨어있는 의미의 지형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이 영화는 현실과 비현실, 존재와 비존재를 혼용한다. 나는 <건즈 아킴보>를 보면서 감독이 말한 영화 <러닝맨>과 <터미네이터>보다는 <인셉션>을 떠올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셉션>의 코믹만화 버전이다.
내가 보이게 <인셉션>보다 <건즈 아킴보>에서 더 심오한 세계의 성찰이 목격된다. 현실은 다중현실로 구성되어 겹쳐지고 충돌하며 인간은 현실의 여러 층위로 출렁거리며 불가항력적으로 흘러간다. 우리의 평온하고 일상적인 현실의 배면에 위치한 세계의 모습을 눈앞에 끌어내어 보여주는데, 전혀 정색하지 않은 게 장점이다.
관객은 영화를 보고,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스키즘’이란 또 다른 세계로 이송되는 동안 영화 속의 사람들, 즉 또 다른 관객이자 ‘스키즘’ 밖의 사람들은 ‘스키즘’에서 이뤄지는 일들을 열광하며 바라본다. ‘스키즘’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스키즘’을 연출한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주인공은 ‘스키즘’과 ‘스키즘’ 너머의 세계-‘메타 스키즘’?-를 넘나들지만 영화 속의 관객은 ‘스키즘’을 통해서만 사실을 이해한다. 사실! 그러한 의미의 균열과 이해불능(혹은 강제된 이해)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전해지지만 영화 속의 관객에게는 끝까지 베일에 가려지게 된다.
마지막에 모든 스토리가 만화로 패러프레이즈되는 것까지, 이 영화는 세계 혹은 존재의 숨겨진 층위를 지속적으로 노출하지만 노출은 결코 영화 속에서 인지되지 못한다. 결말은 “액션 히어로가 되기 싫어하는 사람”이 액션 히어로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
로맨스의 아주 현실주의적인 파국은, 해피엔딩과 정의의 승리라는 도식에 고춧가루 뿌린다. 물론 감독이 의도한 바이다. 피날레 부분에서 로맨스의 결말을 두 층위로 제시한 감각은 좋았다. 만화로 연결한 것도 괜찮았다. 코믹한 영웅서사라는 결말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정색할 만한 상황이 아니고, 현실/의미/존재의 층위가 분열하고 충돌하다가 기이한 접면으로 접합하는 마당에 진지한 리얼리즘은 용두사미가 되었으리라. 포스트모던한 현실인식이 뚜렷하지만 형상화는 생각보다 포스트모던하지 않았다. 오히려 포스트모던 세계의 모던적 형상화라고 해석하는 게 제작진에게 더 큰 찬사가 되리라. 주인공에게 주어진 ‘권총 손’은 과거를 바라보면 2000년전 예수를 연상시키지만 미래를 바라보면 기계인간이라는 전혀 다른 지평의 인간 존재론을 불쑥 꺼내놓게 된다. 그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제목이 ‘건즈 아킴보’로 정해진 데는 하우덴 감독의 게임 애호 취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킴보’는 두 개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하우덴 감독이 1990년대에 했던 ‘블러드 3D’라는 비디오 게임에서 사용한 용어다. ‘블러드 3D’는 살인 게임으로, 기관총이나 산탄총을 가지고 뛰어다니다가 ‘건즈 아킴보’라는 파워-업 모드가 되면 총 두 자루를 꺼내 30초 동안 적을 모두 날려버릴 수 있었다. 작품의 캐릭터와 잘 어울리고, 눈에 잘 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게임 용어를 영화 제목으로 정하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15일 개봉.
글 안치용/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