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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Sep 08. 2020

사랑과 우정에 관한 가장 빛나는 영화적 서사

영화리뷰(영화평)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전형적인 문자세대인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대체로 영화보다는 소설이 더 묵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인간 삶에 관한 깊이 있는 통찰, 세계의 특별한 섬광의 포착 등은 영상이나 소리를 보여주지 않는 문자를 통해서 가능할 때가 훨씬 많다. 그것은 개별 독자가 자신에게 최적화한 방법을 동원하여 각자의 인식 지평을 각자의 마음 안에서 열기 때문일 텐데, 아무리 많은 디테일을 집어넣은 소설이라고 하여도 소설이 최종적으로 독자 스스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장르이기 때문이지 싶다.      


장르를 초월한 빼어난 영상 서사     


영화가 어려운 것은 소설과 비교하여 사실상 모든 것을 확정하여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상, 소리, 부분적 문자라고 할 대화 등이 각각 완벽해야 하고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전체로서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거기에다 관객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 수용자의 도움이 소설에 비해 훨씬 적기 때문에 창작자의 역량이 그만큼 중요하다. 쉬운 일이 아니어서 소설보다 나은 성취를 보여주는 영화를 찾기는 어렵다. 원작이 있는 영화를 원작 소설과 비교할 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영화 한 편을 보고 훌륭한 소설 한 편을 읽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는 장르를 넘어서 매우 빼어난 작품이란 평가를 받게 된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가 그런 영화이다. 이 영화는 나아가 소설을 능가하는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영화로 제작된 20세기의 서사시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 영화는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으로도 유명하다. 주인공 누들스(로버트 드 니로)가 아편에 취해 웃고 있는 모습이다. 아편굴의 침상 위에 누워 천장 역할을 하는 얇은 막으로 된 덮개 아래에서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으로 손색이 없다. 내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엔딩을 설명한다고 하여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직접 본 관객이 느낀 감정을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

누들스의 운명의 여인으로 그가 평생을 사랑한 데보라(엘리자베스 맥고번)가 그들의 고향인 뉴욕에서 할리우드로 떠나기 전날 누들스가 데보라에게 일생일대의 실수를 하고, 누들스가 홀로 바닷가를 서성이는 장면을 보자. 이 장면에서 어느 순간 지평선이 수평선으로 바뀌며 화면을 횡단한 수평선 아래에서 누들스는 잦아든다. 영화를 보다 보면 관객은 조금 지나 비슷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맥스(제임스 우즈)가 바닷가에서 바다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가 서서히 화면을 횡단한 수평선 아래에 잠기는 장면이다. 


비슷한 두 장면에서 나타난 미묘한 차이는 이 영화의 주제를 암시한다. 우선 누들스에게 갈대밭이 만든 첫 번째 선과 바다가 만든 두 번째 선이 차례로 주어진 반면 맥스에게는 하나의 선, 즉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저편에 만들어진 수평선만이 주어진다. 누들스는 끝내 등을 보인 채이지만 맥스는 서성이다 관객과 관객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할 누들스 일행에게로 돌아서서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바다와 해를 등지고 서 있어 맥스의 시선을 파악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두 장면의 배경음악이 다르다. 누들스의 바닷가 장면에 깔린 음악은 ‘데보라의 테마’이고, 맥스의 바닷가 장면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타이틀 곡이 깔린다. 


이탈리안 웨스턴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음악은 마찬가지로 영화음악의 거장인 엔니오 모리코네가 맡았다. 엔딩에서 대사 없이 깔린 음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타이틀곡이고, 엔딩의 엔딩 즉 누들스가 웃는 맨 마지막 장면에 흐른 음악은 ‘데보라의 테마’이다. 수평선이 나온 두 장면과 엔딩은 이 영화가 사랑과 우정에 관한 작품으로 누들스와 맥스라는 판이한 인물의 인생행로를 통해 우정과 사랑을 그려내었음을 말한다. 관객이 더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인물은 거의 이견 없이 누들스이지 싶다. 그는 삶으로부터 배신당하는데 때로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지만 삶을 배신하지는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맥스와 결정적으로 다른 면이다.      

광란의 20년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미국의 대공황과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뉴욕 빈민가 출신 깡패들의 삶을 그렸다. 이 영화를 관통한 주제는 아마도 사랑과 우정일 텐데, 욕망과 배신이 사랑과 우정을 교직(交織)한 구조라고 보면 되겠다.


영화엔 3개의 시간 축이 등장한다. 1920년대 초, 1933년, 1968년이라는 세 시기 미국이다. 영화는 1933년에서 시작해서 1933년에 끝나는 것으로 돼 있어 1920년대를 보여주는 플래시백과 1968년을 보여주는 플래시포워드가 일어난다. 시작과 끝이 1933년이기 때문에, 이 영화의 마지막 아편굴 장면에 착안하여 영화가 그린 것은 누들스가 꾼 꿈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렇게 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누보로망 같은 소설형식에서 시제를 넘나든 것을 떠올려보면 시제에 얽매인 해석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가 다룬 세 가지 시간 축에서 1933년에 이르기까지의 몇 년이 핵심적이다. 영화에도 나오는 금주법(prohibition, 1920~1933년) 시행시기는 미국에서 갱의 전성기였다. 알 카포네라는 갱의 전설이 생긴 이 시기를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무법의 10년’이라고도 하는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중심축이 이때였다. 누들스와 함께 조직을 결성하여 갱으로 활약한 4인 중 누들스를 제외한 세 명이 숨진 연도가 1933년이다. 금주법이 해제된 해이다. 영화는 1933년 누들스의 친구들이 갱짓을 하다가 사망한 장면을 보여주고, 이들이 사망 직후 어딘가에 묻혔다가 1967년에 이장된 호화묘지를 이듬해 누들스가 방문하는 모습을 영화 중간쯤에 보여준다. 세 명 묘비의 사망년도는 모두 ‘1933’이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이 제목 자체로 조명한 시점은 그렇다면 1933년이 되겠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대공항과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시기는 확실히 미국 역사에서 특별한 시기였다. 그렇다고 1968년이 만만한 때는 아니다. 리처드 닉슨이 미국 3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해엔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했고, 미국이 월남전의 수렁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반전 데모와 히피문화가 번성한 시기였다. 1968년 또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1984년에 제작된 이 영화가 1933년과 1968년을 중요한 두 축으로 삼은 데는 확실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1933년과 1968년 중 어느 시점에 더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영화의 느낌이 달라진다. 1933년이면 갱스터무비 또느 느와르 장르에 근접하고, 1968년이면 드라마에 가깝다.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고 보는 게 맞겠다. 노년에 돌입한 1968년의 누들스가 1933년에 황망하게 떠난 뉴욕의 떠난 바로 그 장소에 돌아와서 차를 빌리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려고 돋보기를 쓰는 장면이 장르 구분의 신호로 여겨진다. 


사랑과 우정이 세상의 모든 것이었던 시절, 욕망과 배신에 내몰려 젊음을 떠난 누들스. 그에게 35년은 정지한 시간이었고 증발한 나날이었다. 35년 만에 많은 것이 교직한, 아름답고 추한 것이 공존한 삶의 패브릭을 목도하면서 누들스는 비로소 35년을 회복한다고 하겠다. 엔딩의 웃음의 의미는 20대 후반 청년이 연인을 상상하며 퍼지는 사랑의 웃음이기도 하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초로의 달관의 웃음이기도 하다.      


다윗의 별     


이 영화는 긴 영화다. 레오네 감독의 당초 최종 편집본은 7시간짜리였다. 상업영화로 개봉하기엔 너무 상영시간이 길어서 229분으로 재편집해 제작자에게 넘겼고,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출품해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1984년 미국에서 개봉할 때는 레오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39분으로 편집되어 공개되었다. 1984년 12월 한국 개봉작은 이것을 다시 줄여 108분짜리로 상영하였다. 영화심의 과정에서 폭력 등을 이유로 30분가량이 잘려 나갔다고 한다. 1984년 한국 개봉작은 게다가 영화를 시간순으로 편집하여 공개하였으니, 당시 관객은 거의 쓰레기나 다음 없는 작품을 본 셈이다.


국내엔 2015년에 재개봉하였고, 현재 통용되는 편집본은 251분짜리 감독판이다. 4시간이 넘는 영화이고 수작이다 보니 4시간여의 관람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보고 느낄 것, 또한 평론가 입장에서는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다.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고, 이 영화의 배경에 자리한 유대 문화는 살짝 언급하고자 한다. 누들스의 이름은 데이비드이고 이것은 고대 유대 왕국의 실질적 창업자 다윗의 영어식 표기이다. 다윗은 ‘사랑받은 자’란 뜻을 내포한다. 데이비드 누들스가 사랑한 여인의 이름 데보라 역시 유대식 이름이다. 누들스 무리의 본거지인 식당이나 또 그의 동료가 묻힌 무덤에 이른 바 ‘다윗의 별’이 표시된 것은 상징적이다. 식당의 ‘다윗의 별’ 아래엔 히브리어가 적혀 있다. 누들스와 갱스터 친구들이 성장하고 교류하고 활동한 문화가 미국적이면서 동시에 유대적인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맥스는 그 그룹에서 유대 식 표현으론 유일한 이방인이었다. 

그렇다고 유대적 상징을 과도하게 이 영화에 이입할 것까지는 없다. 한때 데이비드란 유대계 청년이 미국의 어느 미친 시절에 존재했고 그에겐 “미쳤다(crazy)”라는 말을 미친 듯이 싫어하는 친구가 있었고 미친 듯이 사랑한 여자가 있었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배신으로 친구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을 지닌 채 고향을 떠나 35년을 은거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둘도 없는 죽마고우가 배신한 것이며 그가 모두의 돈을 가져가고 자신의 여자마저 빼앗았다는 사실을 35년이 지나 알게 된다. 자신을 배신한 친구와 자신이 죽도록 사랑한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 데이비드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이쯤에서 데이비드가 ‘사랑받은 자’란 뜻을 지닌 다윗이며 그 식당의 유리창에 ‘다윗의 별’이 붙어 있었다는 걸 다시 기억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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