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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Nov 27. 2020

국가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사랑과 존재를 짓밟는다

영화리뷰(영화평) '판타스틱 우먼'

영화리뷰(영화평) '판타스틱 우먼'


“관객은 영화 <판타스틱 우먼>의 주인공에게서 무엇을 보게 될까? 여자, 남자, 아니면 둘 다? 그들은 눈앞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무너지고, 또다시 성장하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강조는 필자)     


<판타스틱 우먼>을 연출한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의 말이다. 사실은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본 것이 그렇다고 말이고(감독은 최초의 관객이다.), 더 정확하게는 감독이 이 영화에서 그려낸 것이 그렇다는 말이겠다. 관객인 내 눈에도 여성, 남성, 아니면 양자이거나, 권면한 대로의 ‘사람’이 보이긴 한다. 당연히 나에겐 다른 것도 보이는데, 가장 두드러지게는 성 정체성을 이유로 국민국가에서 배제되어 고통 받는 국민이 목격되었다. 감독이 의도한 성(性) 너머의, 또는 성(性) 위의 위태롭고 고통스러운 인간을 확연하게 볼 수 있지만, 시야를 조금 넓히면 순수하게 사적인 영역마저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국민국가의 촘촘한 폭력의 망을 볼 수도 있다. 사적인 고통과 정치적 고통이 중첩되는 지점이다.     


병리적인 비존재에서 혐오스런 존재로 격상?     


<판타스틱 우먼>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낮에는 웨이트리스, 밤에는 재즈 바 가수로 활동하는 주인공인 트랜스젠더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는 자신의 생일날 밤에 함께 생일을 축하한 연인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리예스)가 급사하는 황망한 사건을 겪는다. 오를란도의 죽음을 정리하는 사회적인 과정에서, 트랜스젠더 연인이기에 마리나는 온갖 부당과 고통을 당하지만, 사회적 폭력에 맞서 사적인 존엄을 지켜낸다는 것으로 영화를 요약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개인의 성적 취향 자체는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정상적이지 않은” 성적 취향에 대한 주변의 불편한 시선이 그려지고 “호모 새끼”라고 욕하며 폭력적인 혐오를 드러내는 장면이 묘사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비정상의 성적 취향’의 용인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한 마디로 혐오하는 존재이지, 병리적인 비(非)존재는 아니다. 

따라서 영화는 마리나의 성적 취향이나, 또는 마리나와 오를란도의 사랑을 설명하는 데 특별히 공을 들이지 않는다. 성적 취향 자체보다는 그로 인한 마리나의 고통을 포착하는 일에 더 힘을 쏟는다. 이쯤에서 동성애를 다룬 영화에서 반드시 거론될 법한 닐 조던 감독의 <크라잉 게임>(1993)을 떠올려보자. 그 영화에서 나름 충격적인 장면으로 전해지는 (남성) 성기 노출이 어떻게 한국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통과했을까는 두고두고 한국 영화계에서 회자된다.  


영화 <크라잉 게임>에서 이 장면은 딜로 분한 제이 데이비슨이 게이인 여장남자 혹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선 불가피했다. 만일 성기 노출이 없었다면 관객과 마찬가지로 그때까지 딜을 여자로 알고 있던 극중 퍼거스(스티븐 레아)가 딜을 밀쳐내고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는 장면이 생뚱맞았을 것이다. 종종 공연검열위원회로 운위되는 공연윤리위원회가 성기 노출을 허가할 정도로 비존재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법은 영화 <크랑잉 게임>에서 필사적이었다. 


영화 <판타스틱 우먼>에서는 혐오에 맞서는 존재의 존엄을 내세우기 때문에 동성애 자체는 주변화한다. <판타스틱 우먼>의 마리나와 <크라잉 게임>의 딜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지만 <판타스틱 우먼>에서 사랑 자체가 주변부로 밀려나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커밍아웃한 딜과 달리 마리나의 말하자면 신체구조가 모호하게 처리된다. 사실 <판타스틱 우먼>과 같은 주제의식에서는 그것이 모호하게 처리되는 게 훨씬 더 타당하다. 


남자 성기를 몸에 지니고 있든 없든, 중요한 사실은 어떤 인간 남성이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성을 거부하고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성의 삶을 살기를 결정했다는 데에 있다. 또한 연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그 여성의 삶이 사적인 영역을 넘어서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영역으로 올려져 조롱받고 유린당한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다. 


<크라잉 게임>에서는 트랜스젠더의 사랑, 또는 연인 만들기를 그리지만, <판타스틱 우먼>에서는 연인 잃어버리기를 통한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다룬다. <판타스틱 우먼>이 어느 여성의 이야기인 반면 <크라잉 게임>은 사랑 게임을 벌이는 남녀가 아닌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맨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판타스틱 우먼>에서 나는 감독이 원한 대로 사람을 보지만, 동시에 훨씬 더 분명하게 여성을 본다. <판타스틱 우먼>의 여성은 진짜 여성이다. 존재의 존엄을 걸고,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방식이 아닌,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험난한 경로를 택했다는 측면에서 그 여성은 가장 인간적인 여성이다.      


문재인 정부 개헌안에서 기본권의 주체는 국민이 아닌 사람이다     


딜과 마리나 모두 필사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비존재를 벗어나기 위한 행위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행위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딜은 세상을 다 잃어도 퍼거스를 얻으면 된다. 반면 올를란도를 잃어버린 마리나는 세상 전체와 싸워야 한다. 


시작부터 녹록지 않다. 느닷없이 찾아온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가는 애인을 차에 싣고 마리나는 미친 듯이 달려 그를 병원에 데려다 놓았지만, 병원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마리나는 곤경에 처한다. 그동안 둘 사이에는 자명했던 관계가 갑자기 자명하지 않은 것으로 바뀐다.


처음에 간호사가 마리나에게 오를란도의 가족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럼 모르는 사이냐고 하자, ‘친구’라고 말한다. 이어진 의사와 문답에서는 의사가 가족이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한다. ‘파트너’라고 덧붙인다. 오를란도의 사망 판정 후 그의 동생과 통화에서는 마리나가 가족이 아닌 것으로 바뀐다. 


이제 경찰관과 문답이 시작되고, 이때는 고인과 관계보다는 마리나의 정체성이 문제가 된다. 경찰관이 ‘아가씨’의 신상정보를 묻겠다로 시작한다. 이름? 마리나. 신분증 있냐? 있다. 마리나가 주저하며 신분증을 꺼낸다. 아직 (바꾼 성에 맞춰) 이름을 바꾸지 못했다고 하자, 법률상의 이름이 이름이라고 대꾸한다.


신분증에는 아마도 ‘다니엘’이란 남자 이름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사이 도착한 오를란도의 동생에게 경찰관은 “이 남자가”로 마리나를 지칭하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반면 동생은 마리나를 이 “여자분”이라고 지칭한다.(동생 입장에서는 갑자기 고인이 된 형이 생전에 남자와 사귄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보다 여자와 사귄 ‘정상적인’ 사람으로 남는 게 더 마음이 편했을 수 있다.) 


마리나 자신은 스스로 꿋꿋하게 ‘마리나 비달’이라고 주장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를 보고 남자라고 불렀다가 여자라고 부르고, 마리나라고 했다가 다니엘이라고 한다. 나중에 경찰서에 출두해 오를란도 죽음과 무관함을 밝히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혼란 혹은 분열은 반복된다. 그 전에 마리나를 만났을 때 마리나를 여성으로 대접한 여형사가 신체검사장에서는 의사와 귓속말을 나누면서 마리나를 남성으로 표현한다. 다니엘로 부르지 말고 마리나로 부르고 여성으로 대접하라고 조언한다. 즉 실체는 남자 다니엘인데, 당사자가 모종의 착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속는 척하면 된다는 시각이다.


이때 국민국가 경찰공무원의 인식은 확고하다. 앞서 병원의 경찰관이나 신체검사장의 형사와 의사까지, 그들에게 그들 앞의 27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고 성별이 무엇인지는 그의 주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관리하는 서류에 의해서 입증된다. 영화에서 속아주는 그들에게 객관적 진실은 고정적이기에, 사실은 허위의 진실로 개인을 속이는 공공연한 폭력과 억압을 행사한다.  

영화 속에서 국민으로 존재하는 이는 다니엘이고, 자신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마리나는 비국민이 된다. 근대국가 성립기에 국가는 주권이 미치는 배타적 영토 내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권을 활용하여 국민의 기준을 제시하며 국민화의 과정을 진행했다. 영화 속 국가에서 마리나는 국민이 아니며, 따라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동시에 가족제도의 보호도 받지 못해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다. 시신을 인수할 자격도 없다.


결국 “성인들끼리 합의한 건전한 관계”는 사적인 영역에 머물렀을 때만 존중되고, 사적인 영역을 떠나자 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된다. 사적 영역 밖에서까지 주장되는 관계는 무시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된다. 사랑의 한 형식인 산 몸에 대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점유는 죽은 몸에 대해서는 관철되지 않는다. 사랑한 한 쪽 당사자가 아직 산 몸이어도 다른 쪽 죽은 몸에 대해 어떠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랑은 강제로 종료된다. 


개체의 결정에 전적으로 복속되는 영역이라고 믿은 비정치적인 사생활이 사실은 국가적인 체계의 지배를 받는 정치적이고 은폐된 공적 영역임을 영화는 드러낸다. 다만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감독이 의식하며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감독이 “<판타스틱 우먼>은 로맨스이면서 판타지이자 다큐멘터리다. 주인공 마리나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영화의 주제는 단 한 가지로 수렴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는 사적 영역에 드리운 정치적 지평을 의식하기보다 사적 영역에서 펼쳐진 문제적 개인의 존재 혹은 실존을 그리는 데 역점을 둔 것처럼 보인다. 때로 감독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는 성의 담론에서 정치적 맥락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누군가는 문재인 정부에서 내어놓은 정부 개헌안에서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이 아닌 사람으로 설정했다는 대목을 갑자기 떠올릴 수 있겠다. 내가 그랬다. <판타스틱 우먼>은 칠레 영화이다.     


거울


영화 <판타스틱 우먼>에서는 마리나가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영화 속에 거울과 비슷한 장치를 빈번하게 설정해 마리나는 거기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종종 살펴본다. 특히 오를란도 아들 일당에게 끌려가 수모를 당하고 버려진 뒤 투명 테이프로 칭칭 감겨져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모습은 마리나의 존재와 자아의 분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컷이다. 


거의 끝부분 나신 장면에서 거울이 등장하여 대미를 장식한다. 손거울은 벌거벗은 마리나의 샅 부분에 위치해 생식기를 가린다. 다리 사이에 손거울이 놓여 있었기에 <크라잉 게임>처럼 불쑥 등장한 남자 성기 대신 거울에 비친 마리나의 얼굴을 관객들은 볼 수 있다. 생식기를 가린 거울 속의 마리나를 관객과 마리나가 동시에 응시한다. 다리 사이에 무엇이 있든, 나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전하는 장면이다.


거리의 거울 장면은 좀 과했다. 인간에게 거울은 제3자, 혹은 아담 스미스의 표현을 빌면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의 기능을 수행한다. 존재가 분열된, 혹은 존재의 분열을 강제당하는 마리나와 같은 인물에게 거울은 더 과격한 의미의 ‘공정한 관찰자’로 성찰과 성장을 은유한다. 영화적인 성찰은 이번에는 어쩐지 영화적인 성취를 획득하지 못한 듯싶다. 무엇보다 거리의 굴절된 거울 장면은 흔해서 좀 식상한데다 관객에게 성찰하고 있음을 너무 과시하는 것 같아 몰취미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오페라 두 곡이 울려 퍼진다. 실제 어릴 적부터 오페라 가수를 꿈꾼 주연 배우 다니엘라 베가가 직접 비발디의 오페라 [바자제]의 수록곡 ‘Sposa son disprezzata’와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의 수록곡 ‘Ombra mai fu’를 불렀다. 영화를 마무리한 ‘Ombra mai fu’는 그 가사가 영화와 잘 어울린 데다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영화적 결말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판타스틱 우먼>은 제90회 아카데미시상식 외국어영화상,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3관왕(각본상/테디상/에큐메니컬 심사위원상 특별언급) 등을 비롯 많은 상을 받았다. 

주연배우 다니엘라 베가(Daniela Vega) 

영화의 특성상 주연배우에 대해서는 간단하게라도 언급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영화사 제공 자료)  

다니엘라 베가ㆍ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용기 있는 여정을 시작한 트랜스젠더 마리나 역은 칠레 출신의 트랜스젠더 배우 겸 가수 다니엘라 베가가 맡았다. 8살 때, 오페라에 특별한 소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산티아고 내에서 소규모 공연을 시작하며 예술에 대한 취미를 키웠다. 남자 학교에서 줄곧 자라온 그녀는 십 대 후반, 스스로 트랜스젠더임을 깨닫고 전환을 시작한다. 칠레 자체의 보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부모님과 남동생은 그녀를 지지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헤어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그녀는 여가 시간마다 연기에 대한 꿈을 키웠고, 2011년 연극 [La Mujer Mariposa]로 데뷔했다. 이후 2014년, 작곡가 마누엘 가르시아의 곡 ‘마리아’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며 칠레 내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한 그녀는 같은 해 첫 장편 영화 <게스트>(2014)에 출연해 배우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각본에 도움이 되고자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과 만난 그녀는 감독의 제안에 <판타스틱 우먼> 출연을 결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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