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영화리뷰) <런>
한정된 공간, 단순한 관계의 한정된 인물로 스릴러를 만들어낸다면 영화 <런>이 거의 최대치의 스릴을 구현하는 데 성공한 작품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정적인 스릴러로 스릴의 동학을 힘있게 가동하려면 전편을 장악하는 긴장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강약의 리듬 속에 정밀하게 구조화하여야 하며, 확실하고 개연성 있게 미스터리를 해소하면서 흥미로운 반전을 준비해야 한다. 비유로 이야기하면 얼음이 언 호수를 건너야 하는데, 얼음의 두께가 얇아 언제 깨질지 모르고 사방에서 끊임없이 금이 가는 가운데 어렵사리 건너편에 도달하는 이야기이다. 또한 저편에 도달하는 순간에 맞춰 호수의 얼음이 일제히 깨져야 한다. 호수의 수면 역할을 한 얼음이 사라지며 물속에서 건넘의 의미를 환기할 무엇인가가 떠오르면 금상첨화겠다.
<런>에서 ‘다이앤’을 연기한 사라 폴슨이 “이 영화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기 때문에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언급한 것과 비유가 우연찮게 호응한다.
캐릭터의 한정을 통한 스릴의 극대화
시간을 통제한다면, (대체로 그렇듯) 공간과 인물에서 위험과 위기가 비롯된다. 영화 배급사에서 홍보한 대로 <런>에서 “가장 안전했던 그곳이 가장 위험한 공간이 된다.” 이때 공간은 인물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낯선 공간에 던져져서 위험해지는 설정이 아니라, 익숙하고 안전한 공간이 낯설고 위험해진다.
영화를 끌어가는 등장인물이 단촐하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외딴집에서 엄마와 함께 사는 ‘클로이’(키에라 앨런). 그런 딸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엄마 다이앤. 남들과 떨어진 호젓한 곳에서 살아가는 모녀와 그들의 집에서 영화가 전개된다. 두 사람이 거의 영화를 끌고 간다. 클로이가 장애인이자 여전히 많은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쉬 차간티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런>에서는 전통적이면서도 감정을 절제하는 동시에, <서치>에서 보여준 긴장감과 자극적 요소로 관객들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 감정적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클로이가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고 어머니에 절대 의존하며 외부에서 고립된 채 살아간다는 설정은 그러한 이유에서 나온 셈이다.
모녀의 아름다운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클로이가 사소한 의심을 하면서이다. 물론 영화가 끝나면 알게 되는 여러 복선은 이미 계속해서 제시된다. 어느 날 식탁에 놓인 장바구니 속의 ‘발견’은 클로이로 하여금 종국에 깨지고 말 호수의 살얼음판에 발을 내딛게 한다. 클로이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은 영화에서 핵심 모티브이다. 비장애인에게 휠체어가 제한적 이동수단이긴 하지만 다리가 마비된 사람에겐 세상과 참여하는 유력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휠체어에 앉은 상태와 휠체어가 없는 상태는, 마치 싱그러운 녹색의 풀밭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살얼음판 위로 버려진 것 같은 급격한 변화를 의미한다. 휠체어 밖의 세상은 위험과 위기로 점철됩니다.
<런>에서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엄마 다이앤의 비밀에 조금씩 접근함에 따라 클로이의 삶은 급전직하한다. 절대의존 관계에서 신뢰에 금이 가면 의존을 하는 사람이 의존을 당하는 사람보다 더 위태로워진다.
모녀의 대결이 심각해질수록 모든 면에서 어머니에게 의존한 딸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모녀의 대결에서는 딸이 어머니에게 아무리 많이 의존하더라도 결코 불리한 처지에 빠지지 않는다. 여러 가지로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혈연에 근거한 어머니의 자기애 대상이 딸이기에 결코 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근원적 제약이 유력한 설명의 하나일 것이다. 만일 자기애를 성립게 하는 혈연이 부인된다면 절대의존하는 사람이 절대 불리해진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클로이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통제하는 어머니 다이앤과 맞서는 상황은 그러므로 최악의 곤경이라고 할 수 있다. 암시된 미스터리가 풀려가는 것에 비례하여 위험이 점점 커지고 결국 최악의 곤경으로 내몰리는 클로이의 모습은 관객을 몰입게 한다.
절대약자가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절대의존 관계의 약자가 관계를 해소하고자 한다면 강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만일 강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관계를 벗어날 해법은 현실적으로 없는 셈이다. ‘절대의존’이란 단어를 말 그대로 쓰면 그렇다는 뜻이다.
해법은 앞서 언급하였듯 자기애에서 찾아지는데, 만일 자기애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클로이가 다이앤의 혈연상의 딸이 아니라, 다이앤 혈연상의 딸의 대체물이었다면 딸의 부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것을 대체할 딸을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다이앤이 ‘딸’에 의존적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예는 주인에게 복종하며 모든 수발을 들지만 전적인 복종 상태가 지속되면 주인은 노예에게 전적인 의존 상태가 되어 관계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런>에서 외형상 즉 물리적인 의존방향이 반대이긴 하지만, 다이앤의 병리적인 심리를 감안하면 감정의 의존방향은 얼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비슷하다.
누군가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관계에서, 지배당하고 통제당하는 쪽에 관계를 개선할 가능성이 없다면 당하는 쪽에서 관계의 일방 즉 자신을 제거함으로써 관계 자체를 해소하겠다는 벼랑끝 전술이 지배자에게 유효할 수 있다. 그것이 자기애이든, 지배와 통제의 욕망이든 대상이 사라짐으로써 관계가 소멸하는 상황은 사랑하고 지배하고 통제하는 자가 가장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힘의 우위가 뚜렷한 사이의 대치를 그리면서, 감독은 관객을 약자의 곤경에 몰입하게 만들고 더불어 클로이에겐 자기파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상황을 헤쳐나가도록 하였다. 절대의존 관계라는 표현은 얼핏 의존하는 쪽의 자기파괴마저 어려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현실에서 어렵게 기도하는 자기파괴는 승부수가 될 수밖에 없고 영화에선 클라이맥스를 구성합니다. 클로이는 살얼음판을 기어서 건너고, 그가 반대편 호숫가에 도착하자 호수를 가득 채운 허위의 얼음은 산산이 부서진다.
선과 악
<런>에서 행위의 주역은 클로이이지만 영화 속의 모든 상황을 구성한 이는 다이앤이다. 전문용어로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든 다이앤의 병리적 심리가 영화를 구성한 허위와 곤란을 창안한 원동력이었다.
다이앤이 분출한 악은, 마침 사라 폴슨의 호연으로 더 선명하게 드러난 악은, 생각보다 악한 악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나오지 않겠냐고 개인적으로 생각하였다. 당연히 납치는 죄악이지만, 다른 나쁜 동기가 아니라 좋은 엄마이고 싶은 욕망에 추동되었고 실제로 좋은 엄마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폴슨이 연기한 다이앤에 한편으론 동정심을 갖게 된다.
선한 동기와 선한 결과로 이어지는 순수한 선의 순환은 세상에 많지 않다. 그리하여 ‘순도’를 결정하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약간의 악이 허용된다. 극단적 예외는 평범한 예외와 본질상 동일한 현상이다. 영화의 결말은, 아마 감독이 영화의 감칠맛과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넣은 마무리 반전에 해당하는 것이겠지만,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선과 악에 관한 성찰을 담았다. 결말의 평범한 예외는 영화 전편(全篇)에 펼쳐진 극단적 예외를 결과론으로 순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절대의존 관계에서 지배자로 위치를 역전한 클로이의 행태는 복수일 수도 사랑일 수도, 아니면 그 어느 중간지점이거나 설명되지 않는 결핍과 욕망의 심리 방정식일 수도 있다. 인간이 어느 정도는 언제나 병리적이며, 선과 악의 흐릿한 경계에서 도덕과 욕망을 조화하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성찰은 사실 부수적인 것이고, <런>은 주로 재기발랄한 미스터리 스릴러로서 정체성을 표출하는 데에 집중했지 싶다.
안치용/영화평론가